이별 잔치
이별 잔치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5.06.08 1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들녘 바람이 박하 같다. 굽어 도는 절벽을 따라 조금 걸으니 일각문이 단정하게 서 있다. 앞서가던 벗이 조심스레 문을 민다. 삐거덕 열리는 시야 속으로 작은 누정이 보인다. 흐르는 물을 배경으로 살짝 풀어진 홑처마 팔짝 지붕 맵시가 우아하다. 난간으로 둘러싸인 통 칸 쪽마루가 주는 까슬함과 친근함에 탄성들이 흘러나온다.

물소리 가운데 앉아 주변 풍경을 둘러보는 사이 큰언니 윤선생이 커피 보따리를 풀었다. 마주 닿은 눈길에서 “오길 잘했지?” 라는 소리를 듣는다. 살짝 입꼬리 올리는 웃음으로 대답을 한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더니 꽃 핀다 호들갑 떨던 때가 언제냐는 듯 요란한 원색 꽃빛에 멀미가 났었다. 사람도 풍경도 공중에 매달린 듯 들뜬 봄이 싫어 오래 꼼짝 않던 중이었다. 

‘도서관 열시 집합.’ 

번개 공지 문구 아래 드립커피 삼종을 음미할 수 있는 패키지까지 덤으로 끼어 있다는 덧글에 마음이 동할 수밖에. 

드리퍼 안 커피가 부풀어 오르며 익숙한 향이 정자 가득 풀어진다. 작은 에소프레스잔 찰랑대는 커피를 한잔씩 들고는 한 칸 마루 안 옹기종기 둘러앉은 여인들이 죽림칠현 흉내를 내다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기둥 한귀퉁이 풍경 하나 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나는 이도 별로 없는 한적하고 고즈넉한 자리. 잠시 떠나왔을 뿐인데 도시와는 다른 풍류가 흐른다. 마음에 맞는 멋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 속 한점 풍경으로 남는 시간이 여유롭다. 산들바람이 분다. 잔물결은 숲과 누각 그림자를 품고 한폭의 산수화를 그린다. 알록달록한 여인들의 옷빛이 산수화 속으로 녹아든다. 그러다 바람이 멈추고 고요해지면 사물들은 명징하게 제 모습으로 살아난다. 흩어졌다 모이는 마음 같다. 비움이 곧 채움이다. 

배면 가운데 손질하지 않은 자연목을 기둥으로 세워 마치 풍경 안에 들어와 있는 듯 소슬한 멋이 있는 이곳 백석정은 낭성천변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다. 숙종 때 기호지방의 대표적 문인인 신교가 바위 위에 세운 누정인데 그의 호가 백석정(白石亭)이다. 당대 유명한 문인들과 시문을 겨루고 학문을 교류하던 곳으로 이름과 어울리게 물가 바위가 유난히 흰색을 띠고 있다. 자연을 누정 안으로 불러들여 시문을 즐기고 사색을 즐기던 옛 선비들의 풍류를 담고 있는 자리에서 고졸한 멋을 즐긴다. 

마지막 커피가 내려진다. 바람을 타고 분홍 꽃잎이 나폴 나폴 날아든다. 나는 이 정취를, 마음에 그려지는 무늬를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한다. 둘러봐도 꽃은 보이지 않고 푸른기 더해가는 이파리들만 수런댄다. 어디서 왔을까. 그 꽃.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아 그 다음이 뭐드라~” 아무도 답이 없다. 짧은 침묵도 잠시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슴하리요” 다음 구절이 따라 나온다. 스마트폰 덕분에 면앙정 송순의 시조를 듣는다. 귀도 마음도 맑고 차다. 가끔은 이리 떠나 마음 불편하게 만드는 세상사들을 잠시 잊어도 좋으리. 

커피도 동이난 이른 오후 모두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자리. 고마움이 밀려든다. 책 벗들 풍류 덕에 풍성해진 내 몸에도 푸른 물이 배어 싱싱하다. 누정의 고아한 정취 속에서 봄을 이별하고 이제 성하의 계절을 맞는다. 쨍쨍한 땡볕도 두렵지 않으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