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대한민국, 그 서글픈 자화상
불신의 대한민국, 그 서글픈 자화상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13.06.06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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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一筆
이기용 충북도교육감, 한범덕 청주시장, 최명현 제천시장, 임각수 괴산군수. 최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앞의 두 사람은 내년 지방선거 출마여부로, 뒤의 두 사람은 자신과 관련된 각종 구설수로 시중의 사석에서조차 그 이름 석자가 아주 흔하게 출몰한다.

이 과정에서 숱한 말들이 만들어지지만 분명한 것은 이 교육감과 한 시장은 지금까지 스스로가 내년 선거와 관련해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들을 둘러싼 소문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또 대책없이(?) 확산된다.

이 교육감의 경우는 “자나 깨나 오로지 교육만 생각한다”고 누차 강변해 왔는데도 언론에선 어느덧 여당의 가장 강력한 도지사 후보로 공식화하고 있다.

최명현 제천시장과 임각수 괴산군수를 둘러싼 의혹들은 현재로선 사실일 수도 또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둘은 당연히 그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최 시장이 사심을 갖고 특정 운동경기부를 신설해 자기 사람을 앉히고, 또 임 군수가 이미 보도된대로 가족까지 동원된 비위를 저질렀다면 스스로가 알아서 자리를 정리해도 부족할 판이다.

다만 문제는 적어도 한 지역을 대표한다는 자치단체장마저 이렇듯 몰가치한 것들로 인해 휘둘리는, 그리하여 그 공적 기능과 위상조차 마구잡이로 매도되는 지금의 넘쳐나는 사회적 불신풍조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도대체 믿으려 하지 않는다. 상대를 신의로써 인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처음부터 불신을 곧추세우며 헐뜯고 깎아내려야 사람들로부터 더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 우리 주변을 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들의 대화에는 냉소와 비아냥이 넘쳐난다. 청소년들의 카카오톡에는 욕설과 험담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조사까지 나왔다. 선뜻 서로를 믿고 또 상대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어느덧 부담스러운 사회적 풍조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불신의 시대가 고착화되어 가는 느낌이다.

냉정하게 따지면 지금의 사회, 더 나아가 국가적 불신의 문화는 역사의 인과관계에서 출발한다. 멀게는 외세 침탈과 일제청산 무산 그리고 독재, 가깝게는 일그러진 여의도 정치문화가 가져다 준 우리 사회의 기본과 원칙이 흔들리는 공정성 상실, 이것들이 한통속이 되어 오랫동안 키워 온 정서가 결국 뿌리깊은 ‘불신’으로 체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끝도 없이 불거지는 원전비리를 대하는 국민들은 올여름 찜통더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예 이 나라의 붕괴조짐을 더 우려하고 있다. 청문회에선 마치 자기들이 국가의 구세주라도 되는 양 정부를 향해 큰 소리를 치다가도 슬그머니 뒷문으로 빠져나가 국민 혈세로 외유를 즐기는 국회의원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또 어떻겠는가. 도대체 어느 누구, 어느 것 하나를 마음놓고 믿을 수 없는 서글픈 세상이 됐다. 모든 게 불신이다.

불신은 마약과도 같다고 했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하나의 불신은 또 다른 불신을 키워감으로써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며느리가 미우면 며느리가 신고 있는 버선 코까지 밉다고 했다. 일반 가정에서도 남편이 부인을, 부인이 남편을 불신하면 기다리는 건 가정의 파탄 뿐이다. 결국 불신은 상대 뿐만 아니라 스스로까지를 황폐화시킨다. 양쪽의 인간성을 똑같이 말살시킨다는 것이다.

사회학에선 사회해체의 단계를 시니시즘(Cynicism)과 사디즘(Sadism)의 순으로 본다. 국가와 사회의 공적기능, 공공가치에 대한 냉소가 결국엔 사람들에게 심리적 가학성을 유발시키고 그것이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과 원칙까지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지금, 다른 사람의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에 더 환호하고 또 그것을 끄집어 내 상대를 절단내려는 풍조를 보면 이미 우리 사회가 사디즘의 단계로 접어들지 않았나를 의심케 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믿음과 신뢰는 우리 인간들에게 그 어떤 삶의 잣대보다도 더 소중한 희망과 가능성을 안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 가장 감동을 받는 순간 역시 내가 아닌 다른 상대로부터 믿음과 신뢰, 인정을 확인하는 때이다.

남에게 믿음을 보낸다는 건 곧 나에 대한 믿음을 더 확고히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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