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이 온다고요?
행운이 온다고요?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6.03.1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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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덴드롱이 꽃잎을 열었다. 눈처럼 맑고 새하얗다. 얼마나 고대하던 꽃무리인가. 여름내 느린 몸짓으로 줄기와 잎만 무성하게 부풀리더니 우수가 지나서야 해산을 한 것이다.

줄기마다 종 모양 꽃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흔들린다. 바람이 볼에 슬쩍 닿기만 해도 청아한 소리가 울릴 듯하다. 꽃을 보고자 눈길 주고 그 곁에서 발자국 흘린 것이 몇 날인가. 한여름 땡볕에 잎이 배들배들 마르고 더러는 호된 추위에 몸살도 앓았다. 온갖 시련을 견뎌낸 대가이다. 생명을 지키려 함께 시간을 보내온 내겐 엄동설한 이기고 꽃을 피운 그 인내가 대견하다.

지난해 행운의 꽃이라며 나에게 분양해 준 문학회 선배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꽃말은 행운이란다. 달뜬 마음으로 전화했다. 선배님의 목소리도 한 옥타브 높아졌다.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며 기대하란다. 조롱조롱 매달린 새하얀 꽃송이를 보면서 행운이 덩굴째 오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기쁘다.

덴드롱꽃은 겉모습이 청초하면서도 우아하다. 큰 수술 하나에 작은 수술 네 개가 돌려나 있어 속눈썹을 말아 올린 듯 요염하기 그지없다. 겉은 우윳빛 종 모양에 속살은 새빨간 꽃잎으로 둘러싸여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처럼 화사하다.

그날 오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보니 낯선 중년 남자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아래층에 산다며 인사를 하더니 조근조근 이야기를 꺼냈다. 아래층 주방 천장에 물이 샌다고 한다. 당황스러웠다.

잰걸음으로 내려가 봤다. 이게 웬일인가. 주방 천장 주변에 물이 스며들어 흠뻑 젖은 벽지는 들뜨고 번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정중히 사과하고 서둘러 도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괜찮다며 도리질을 하는 게 아닌가. 도배한 지도 오래되었고 어차피 더러워질 거라며 극구 사양했다. 그의 따뜻한 배려가 고마웠다.

만일 나라면 그렇게 했을까?

문제가 된 내 집 씽크대 배수관을 급히 보수했다. 다행스럽게 더 큰 공사로 이어지진 않았다. 행운의 꽃 덕분이라 여기고 바로 그 댁을 방문했다. 작은 선물을 챙겨 드리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 부부는 이웃끼리 서로 양보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느냐며 내게 따스한 차 한 잔을 권했다. 그들 마음처럼 따뜻했다. 그 후 만나면 서로 안부 묻는 사이가 되었고, 그들은 간간이 과일이며 맛난 음식을 가져왔다. 나도 특별한 음식을 할 때면 함께 나누어 먹었다. 무릇 그들과의 인연도 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이 나에게 행운을 준 것 같다.

세상은 이래서 살맛 나는 게 아닌가. 행운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을 열면 우주 만물이 꽃이다. 때맞춰 피어오른 덴드롱꽃도 행운이고, 기꺼이 나를 위해 꽃을 분양해 준 선배님도 행운의 여신이다. 거기에 한 지붕 아래 가슴이 따뜻한 좋은 이웃을 만났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으랴.

나는 지금 행운의 꽃과 이웃과 더불어 무한량 행복감에 취한다. 이제 덴드롱이 꽃을 피우지 않아도 안달하지 않으리. 내 곁에 살아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일 테니. 행운의 꽃을 아파트 안에서 혼자만 보고 즐기는 것도 욕심이 아닐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 꽃을 나눠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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