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
모란
  • 정정옥 수필가
  • 승인 2024.04.1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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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정옥 수필가
정정옥 수필가

 

모란의 계절이 다가온다. 화중왕(花中王), 부귀화(富貴花)라는 이름에 걸맞게 귀티가 흐르고 진하지도 야하지도 않은 그윽한 향기가 좋다.

자줏빛 활짝 핀 모란을 보면 바라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고혹적인 여인의 향기가 난다.

가슴 깊이 간직한 정인을 못 잊어 밤새워 오색실을 꿰어 수를 놓고 있는 음전한 조선의 여인을 닮았다고나 할까?

신라 진편왕 때에 당 태종이 보냈다는 모란도를 보고 덕만공주가 “벌과 나비가 보이지 않으니 이 꽃은 향기가 없겠나이다”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모란은 향기가 없는 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란꽃 가까이에서 향기를 맡아본 사람이라면 그 향기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문인께서 쓴 수필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빼어난 문장의 달필이었는데 모란꽃에 벌 한 마리가 날아든 것을 보고 `향기도 없는 꽃에 무슨 일로 찾아들어 희롱을 하는가'라는 문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향기라기엔 아주 어설프고 사람에 따라서는 역한 냄새라고 하지 향기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긴 사람의 취향이 다 제각각이니 내 말이 옳다고 항변할 수 없기는 하다.

그분은 아마도 백합이나 라일락 등의 진한 향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쉰넷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간 큰동서는 모란을 좋아했다.

5월이면 큰댁 화단에는 모란이 흐드러졌다.

화창한 날,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볕을 주체못하겠다는 듯 커다란 모란 꽃잎이 활짝 열리면 벌들은 온종일 꽃술에 파묻혀 윙윙거렸다.

형님은 밖으로만 도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을 달래려고 모란을 가꾸는 일에 온 정성을 쏟는듯했다.

분홍, 자주는 물론 여간해서는 구하기 힘들다는 흰색 모란까지 심어놓고 적막한 봄날을 모란꽃을 보는 낙으로 보냈다. 어쩌면 형님 자신이 모란꽃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큰동서의 삶과 별다르지 않은 친정어머니도 모란꽃을 향한 애정이 각별했다.

봄 가뭄이 시작되면 긴 호수를 이리저리 돌리며 모란꽃이 피기 시작한 화단에 물을 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하셨다.

해가 지난 사과와 배는 푸석해서 맛이 없고 여름 과일은 익지 않아서 화채 만들 과일이 마땅치 않을 때 어머니는 시원한 설탕물에 자줏빛 모란꽃잎을 동동 띄워 주셨다. 그러면 무슨 귀한 과일이라도 넣은 양 향긋하고 달착지근한 화채가 되었다.

큰동서는 외동딸인 내겐 친언니나 다름없이 다정한 분이셨고, 친정어머니는 지아비와 자식을 위해 평생 희생만 하다 가셨기에 늘 애틋하고 저리다. 모란꽃을 일컫는 천향국색(天香國色)이니 부귀영화(富貴榮華)니 하는 말이 두 분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기에 더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두 여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나도 모란을 좋아한다.

모란꽃을 보면 오래전 헤어진 피붙이라도 만난 듯이 반가운 마음이 인다.

길을 걷다가 어느 집 담장 사이로 살짝살짝 모란이 보이기라도 하면 다른 이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 코를 벌름거린다. 꽃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는 날은 활짝 핀 꽃 속에 얼굴을 묻기도 한다. 그러면 꿈에라도 보고 싶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아늑하다.

작년부터 내가 사는 아파트 화단에도 모란이 피기 시작했다. 멀리 가지 않고도 욕심껏 모란꽃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 마음이 설렌다.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어느새 첫사랑을 기다리는 열여덟 소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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