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추 유감(有感)
단추 유감(有感)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4.04.10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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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옷장을 정리하다 낯익은 바지 하나를 발견했다. 큰딸이 고등학생 때 하와이로 연수 가서 사 온 거니까 근 15년은 된 것 같다. 용돈을 넉넉하게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그걸 아껴서 엄마와 동생 바지를 사 왔었다. 미국 브랜드라 우리나라에서 사려면 비싼데 거기서는 싸게 살 수 있다니까 제 딴에는 맘먹고 사 왔던 것 같다. 색만 조금 바랬을 뿐 아직은 멀쩡하다.

처음엔 자주 입고 다녔다. 그런데 차츰 뜸해지다가 자꾸 서랍 안쪽으로 밀려나더니 언제부턴지 입지 않게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작년에도 한 번도 안 입었던 것 같다.

단추 여밈이라 입고 벗기가 불편해서 가끔 급하게 화장실 갈 때 낭패를 볼 뻔했던 적도 있었다.

옷장 정리를 할 때마다 옷 수거함으로 보내야 하나 고민을 거듭하면서도 추억 때문에 버리지 못한 계륵이다.

단추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옛날에는 옷이 신축성이 없어서 티셔츠를 입고 벗을 때 귀가 떨어져 나갈 듯 아프고 또 빨개지곤 했었다. 특히 오빠 옷을 사면 엄마가 목 옆 어깨선을 조금 터서 단추를 달아줬었다. 아마 오빠 머리가 평균보다도 컸던 모양이다. 단추가 발명된 이후 사람들이 몸에 꼭 맞는 옷을 입게 되었듯, 오빠도 단추 덕분에 목둘레가 맞는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땐 가방에 항상 반짇고리를 챙겨 다녔다. 교복 단추가 떨어지거나 솔기가 터지면 바로바로 수선하기 위해서다. 나는 얌전한 편이었는데도 단추도 자주 떨어뜨리고 여기저기 솔기를 뜯기고 했다. 한번은 앞섶 두 번째 단추가 아예 떨어져 나가 없어져 버렸다. 임기응변으로 맨 아래 단추를 떼어 옮겨 달아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결국 선생님께 들켜 복장 불량으로 혼이 나기도 했다.

우리 애들이 옷을 혼자 입기 시작했을 때도 생각난다.

처음엔 첫 단추를 잘못 끼워 삐딱하게 여며지거나 구멍을 건너뛰어 우스꽝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 풀고 처음부터 다시 채우느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차분히 첫 단추와 첫 구멍을 먼저 찾아보라고 가르치곤 했다. 고사리손으로 어렵게 단추를 채우던 애들 모습이 떠오른다. 그랬던 삼 남매 중 두 딸이 어느새 결혼이라는 첫 단추를 잘 찾아 채우고 저들만의 둥지를 틀었다.

천양희 시인은 <단추를 채우면서>라는 시에서, 단추를 채워보니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고 했다.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라고도 했다. 시인의 말처럼 어쩌면 삶이란 자신의 마음을 단추처럼 여며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꾸 쉽고 편한 옷들만 찾게 되는 것 같다. 참을성이 없어지고, 즉흥적으로 반응하고, 편한 대로만 생각하려는 성향이 부쩍 늘었다.

단추보다 지퍼를 찾는 것도 아마 그 이유일 것이다.

미국 소설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말이다. `지퍼가 단추를 대신하면서 인간은 새벽에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만큼의 생각할 시간이 줄었다. 철학적 시간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나는 어느샌가 첫 단추를 찾을 때의 신중함을, 차례대로 제 구멍을 찾아 끼우는 수고와 마지막 단추까지 채우는 성실함을, 또 헐거워진 단추 살필 여유를 잊고 살아온 듯싶다.

바지를 펼쳐 입고 단추를 채워 매무시해본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조금은 느긋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어쩐지 올해엔 종종 꺼내 입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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