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를 모르는 것들
포기를 모르는 것들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4.04.0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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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화분이 쩍 벌어졌다. 두 동강이 났다. 정확히 반토막이다. 깨진 화분 안에 같은 형태인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틀의 형태와 같은 무엇이다. 무엇인가? 얼기설기 엉켜있는 뿌리다. 화분 안에 한 줌의 흙도 없다. 오로지 뿌리만이 화분의 형태가 어땠는가를 보여준다. 썩은 뿌리가 삭지도 않고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색만 변했을 뿐이다. 주변으로 뽀얀 실뿌리 몇 가닥이 보인다. 정작 화분 안에 있어야 할 흙이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흙은 어디로 간 것일까? 흙을 먹어 치우기라도 한 것인가? 흙을 먹이 삼아 세력을 넓혀가던 뿌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이미 정해진 틀 안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틀을 부순 것이다. 살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질그릇 항아리였으니 깨고 나오기라도 했지, 플라스틱 화분이었다면 그 안에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자멸했을 것이다.

작약 씨앗을 발아시켜 삼 년 차에 접어드는 화분 안에 제비꽃이 피었다. 꽃이 지고 씨앗을 맺기라도 하면 아주 난감해지는 상황이 벌어질 것, 화분을 뒤집어 심어진 것을 빼내었다. 순순히 응할 생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물 빠짐 구멍 바깥으로 뿌리가 잔뜩 나와 있다. 나와 있는 뿌리를 칼로 도려내고 다시 뒤집었다.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결국 화분 구멍만 한 막대를 집어넣었다. 똥침을 넣듯 밀어 넣었다. 안간힘을 주었다. 팔뚝에 힘이 들어가서야 슬슬 포기하듯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뿌리가 꽉 차 있었다. 이렇게까지 잘 자라는 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물주고 때 맞춰 영양분 공급을 적정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겨우 붙어 있는 흙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 사용하는 도구는, 뾰족한 대나무 송곳이다. 가능한 뿌리가 다치지 않게 공을 들였다. 제비꽃을 제거하려 하다 작약이 다치면 안 되니 더욱 조심히 다뤘다. 긴 사투의 시간이 지나고 드리어 작약과 제비꽃이 분리되었다. 이런! 작약 뿌리가 아니었다. 제비꽃 뿌리였다. 설마설마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였는데, 작약은 순만 남고 거의 썩어 있었다. 흙의 표면 위로 작게 있어 하찮게 보았는데 몇 년은 묵은 것 같다. 결국 공들인 시간은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여기저기 많은 화분 안에 제비꽃이 꽃을 피웠다.

분명 꽃대가 하나였는데, 어느새 많은 영역에 자리를 잡았다. 꽃이 이뻐 봐준 것은 아니다. 지상부의 몇십 배에 달하는 뿌리를 속으로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보이는 족족 뽑아 버렸는데, 아니 삽으로 구덩이를 파가며 캐냈는데, 결국 점령당했다. 가꾸지 않아도 자라는 생명에 무참히 패배했다. 제비꽃이라는 이름이 있는 잡초의 승리다.

텃밭, 빨간 순이 송곳날 내밀 듯하더니 금세 삐죽삐죽 대를 올렸다. 잡초가 꽃을 피우기 전에 서둘러 붉은 순을 올렸다. 그 많던 잡초 사이에서 죽지 않았을까 걱정이었다. 재작년 발아한, 씨앗을 달고 있는 녀석을 아주심기 했는데, 바로 숲이 우거지듯 잡초가 점령을 했다. 그 속에서 당연 죽었거니 했는데, 어느 녀석 하나 죽지 않고 모조리 싹을 틔우고 대를 올렸다. 애써 돌보지 못한, 영양제 한 번 주지 못한 미안함을 기쁨으로 가슴벅차게 만든 작약의 승리다. 빨간 깃발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낀다. 잡초사이에서의 생존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다.

애써 가꾼다는 것, 관심을 둔다는 것인데 너무 많은 것을 가꾸다 보니 한순간 방심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생물이 자라는데 멈춤이 없다 보니 기다릴 수 없기에 좀 더 큰 화분으로 옮겨줘야 하는 시기를 놓친 것이다. 화분을 갈아주지 않더라도 포기나누기라도 해줬더라면 화분이 깨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죽지 않을 것 같으니 어쩌면 방치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차라리 화분에 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말 못 하는 식물이라지만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인데, 너무나 억지스럽게 통제하려는 것은 아닐지? 절대 포기를 모르는 것들은 나름의 방식이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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