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한 무한 신뢰
배신당한 무한 신뢰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4.03.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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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공공기관 청렴도나 신뢰도 조사에서 법조계 순위는 늘 하위권이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 같은 케케묵은 용어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언어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법조에 대한 냉정한 국민적 정서는 정치판에서 완전 반대로 돌변한다. 국회에 진출한 전문직군 가운데 판·검사와 변호사 출신 비중이 가장 높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15%가 넘는 46명이 당선됐다. 이번 총선에도 법조 이력을 내세운 후보들이 대거 출마했다.

국회 역시 신뢰도 조사에서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기관이다. 불신받는 두 기관이 유착한 정치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법률 전문가들의 입법부 진출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국회 생산성을 높이고 실추된 도덕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조 출신 의석이 늘어가는 동안 계류 법안들에는 먼지가 더욱 쌓여갔고 심의 한 번 못하고 회기만료를 맞아 자동 폐기되는 법안도 늘어났다.

반면 정쟁은 사생결단의 난투극 수준으로 치달렸고 방식은 졸렬하고 저열해졌다.

불체포특권 등의 특권 내려놓기, 선거제도 개선 같은 정치개혁 과제들은 멈췄거나 되레 퇴보했다. 상임위 회의 중 코인 거래, 대장동 50억 클럽,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같은 국회 위상을 추락시킨 불미스런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율사 출신들이 중심에 서거나 깊이 연루되기 일쑤였다. 법률 지식을 악용해 미꾸라지처럼 처벌을 피해다니는 사람을 의미하는 `법(法)꾸라지'라는 비유어가 국회에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총선 공천 과정에서도 법조 출신 후보들의 물의와 낙마가 속출했다. 부동산 38억원에 대출이 37억원이라고 신고해 갭투기 의심을 받은 변호사, 초등학생 성폭행범과 집단 성폭행범 등을 변호한 전력이 드러난 변호사, 5·18 민주화운동 때 북한군 개입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던 변호사 등이 받은 공천장을 반납해야 했다. 1년새 재산이 41억원이나 늘어난 한 검사출신 후보는 지난해 검찰서 퇴임한 남편이 전관예우를 누렸다는 의혹을 받는다. 이들 말고도 이런저런 의혹과 구설에 오른 법조 후보들이 숱하다

법조가 장악한 정치의 현주소는 지금 진행되는 총선의 유력 정당 진영에서 드러난다. 거대 양당의 선거전을 검사와 변호사 출신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비례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3당을 예약한 신생 정당의 리더도 법학자 출신이다. 검사 출신 대통령까지 포함하면 가히 `법조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들의 주도로 펼쳐지는 총선 풍경은 척박함을 넘어 살벌하기까지 하다. `범죄자 심판'과 `검찰독재 척결'이란 배타적 구호와 천박한 언사의 교환만 있을 뿐 민생을 보듬을 감동적인 공약은 눈을 씻고도 찾기 어렵다. 선거가 끝나면 또 다시 치졸한 악다구니의 시간, 복수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않다.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싸고 정부와 의사단체 간에 벌어지는 이른바 의정갈등을 대한민국 양대 엘리트 집단의 충돌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두 집단의 한치 양보없는 대치는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지만 상대를 무릎 꿇려야 직성이 풀리는 완승 의지 앞에서 해결은 요원한 상태다.

민의를 외면하고 외길을 고집하는 의사단체의 불통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조율과 타협이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해법을 모색해야 할 정치라는 공간에 둥지를 튼 집단의 책임이 더 크다.

정치 퇴보에 대한 책임을 법조 출신 의원들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베푼 무한 신뢰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법조 출신 정치인을 넘어 법조계 전반의 집단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유권자들도 소명의식은 없이 권력욕만 좆아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꾀하는 사이비 엘리트를 가려내는 안목을 갖춰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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