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했다
당했다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23.09.0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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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씨앗 한톨

 

어이없게도 당했다. 두 번 다 뜬눈으로 당했다. 공교롭게도 대여섯 살은 될 법한 아이들에게 당했다. 세상에 비빌 언덕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뜩잖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진정한 상태에서 그 일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자아이가 첫 번째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그 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저 사람'이라고 지칭하였다. 아이의 아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저 사람이라고 그러면 안 돼”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바로 옆에 있다가 `저 사람'이란 말을 연달아 들으면서, 졸지에 낯선 이방인이 되는 기분이 들고 말았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식의 이물감(異物感)에 시달렸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아이가 나중이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늘막에 앉아있던 그 아이가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는 아빠에게 말했다.

강대헌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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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도 늙은 거 같애. 흰머리가 하나 있다니까.” 뒷편에 있던 나를 못본 아이의 아빠는 아이의 말에 놀라지도 않으면서 대답했다. “네가 늙긴 뭐가 늙었다고 그래.”

반백(斑白)의 머리로 일상의 거리를 걷던 나는 기운이 쑥 빠지고 말았다. 졸지에 어르신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목적지였던 동네 커피집이 더 멀게만 느껴졌던 날이다.

주인공은 아이들이었고, 나는 그들의 눈에 비친 엄연한 타인으로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린아이들에게 느닷없이 당하는 것도 당신의 삶을 싹 틔우는 씨앗 한 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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