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의 지극한 효심 기리며 孝정신 계승
선현의 지극한 효심 기리며 孝정신 계승
  • 연숙자 기자
  • 승인 2007.08.17 2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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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경경'이 고려 관리로 등용해 정착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다 보면 청주와 경계를 이룬 청원군 효촌리 버스정류장 옆에 작은 누각이 하나 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있는 듯 없는 듯한 건물이지만, 이곳에는 효촌마을유래비와 함께 아버지의 병환을 구하기 위해 한겨울에 잉어를 잡아 바친 경연의 효행을 기리는 효비각이 세워져 있다. 마을을 대표할 만큼 효
행을 쌓은 경연은 청주 지북동과 효촌 일대에 세거지를 이룬 청주 경씨의 선조다. 효의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효자 가문으로 오늘날도 회자되고 있는 청주 경씨 문중을 찾아가 보았다.

경씨는 청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는 단일 성씨지만, 연원은 중국에서 시작된다. 중국 송나라 하내 지방에 살던 강태사의 후손에서 분파하여 생겨난 경씨는 고려 광종의 귀화정책에 의해 초빙학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광종은 호족들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중국의 유명한 학사들을 초빙하여 고려에 귀화시키고 조정으로 끌어들이는데, 이때 학사의 일원인 경경(慶鏡·청주경씨의 비조)이 고려의 관리로 등용되며 우리나라에 정착한다. 하지만 광종의 죽음으로 총애를 받던 신하들이 죽거나 피신하며 경씨 역시 역사의 수면 아래로 묻히게 된다. 이후 200여년 동안 경씨가 역사서에 안보이다가 무인시대에 경대승의 아버지인 경진이 등장하며 청주 경씨 시조가 된다. 경진은 고려 명종때 중랑평장사를 지냈으며, 반란을 일으킨 조위총(趙位寵)을 평정하며 공을 세웠다. 아버지에 이어 무신이 된 아들 경대승은 무인정권 초기 정중부를 제거하며 정권을 장악, 최고 권력자로 혜성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20대에 장군에 오른 그는 서른의 나이에 요절함으로써 역사상 두고 두고 안타까운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정권을 제압하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경대승으로 하여 경씨 후손들의 자취가 잠시 사라진다. 이후 고종조에 호부상서를 지낸 경번이 청주를 세거지로 자리잡고, 증손인 경복흥이 청원 부원군에 봉해지며 경씨는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기록되지 않은 고려 이전의 문중에 대해 신호철 충북대 교수는 "청주 경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청주 토씨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청주 유일의 국보 철당간에도 청주 경씨인 경주홍과 경기준이란 인물이 당간을 세우는데 기여했다는 기록 등으로 볼때 이들은 신라말기 청주일대를 지배하던 청주의 호족세력이 분명하다"고 경대승 인물탐구를 통해 밝히고 있다.

단일성으로 많은 씨족이 남아 있지 않지만 유교적 가풍을 청주에 뿌리내린 문중으로 평가받고 있는 청주 경씨는 세거지인 지북동과 괴산 연풍, 소수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관련 문화재로는 지북동 일원에 청주경씨사적비와 청주경씨표산비, 경대승신도비, 경연묘소 등이 남아 있다.

◆ 인물 & 인물

천하 호령했던 청년무사 '경대승'

무인시대 최고 권력자… 문중 추앙 인물

▲ 경대승
TV로 방영된 역사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조용하면서도 카리스마로 시선을 집중시킨 인물이 있었다. 20대 젊은 장군으로 천하를 호령했던 경대승이다. 청주 출신으로 무인정권의 최고 권력자에 오른 그는 문중에서도 제일 먼저 꼽는 역사적 인물이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지만, 그는 청렴한 행동으로 민심을 얻는데 성공한다. 고려사 경대승 열전을 살펴보면 "경대승은 토지대장을 모두 군대에 바치고 하나도 취함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 청백함에 탄복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요절했을 때도 "경대승의 장례식때 길가에 모인 사람들 중 통곡 아니 하는 사람 없었다"고 적고 있어 그의 인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무인의 맥은 후손으로 이어지며 경복흥은 홍건적의 난을 물리치며 공을 세웠고, 그의 아들 경보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참여해 조선 개국공신이 된다. 특히 경복흥은 나라에서 백성을 동원해 성을 쌓으려하자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진다는 이유로 반대해 도성수축을 중지시키는 등 민초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조선 성종 때 사헌부장령인 경
▲ 경연호

준은 부당한 권력자를 탄핵하고, 지방행정관의 무능함과 공주들의 화려한 생활을 논박하는 등 강직한 성품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또 경섬은 임진왜란 뒤 통신부사가 되어 포로로 잡혀간 1200명의 백성을 데려오는 등 국교재개에 앞장 선 인물로 평가받는다.

근세인물 중에는 1907년 구례와 곡성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던 경권중이 3·1운동 때 선봉에 섰다가 체포되어 옥사한다.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독립투사 경석조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의병을 일으키고 독립운동을 한 성균관교수 경현수 등이 있다.

현대인물로는 경석헌 건국대 전 농대학장과 경청호 현대백화점총괄사장, 경진석 전 농협옥천지부장, 경흥호 감정평가원, 경한석 가톨릭충북신도회장, 경성호 전 충북광복회장, 경동순 전 대한통운지점장, 경석근 전 시청공무원, 경인구 한의사, 경석준 향토사학자,

▲ 경진호
경민호 전 경찰공무원, 경노현 시인, 경대호 시인, 경경호 충청대학교수, 경제호 교육공무원 등이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경경호 교수는 "단일 성이고, 많은 씨족은 아니어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은 별로 없지만, 선대부터 효와 의를 중시하는 가풍이 성품으로도 이어져 불의를 보면 참지못하는 편"이라며 "의로운 선조의 정신이 미래 세대로 전해지며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고 밝혔다.

 

 

 

▲ 경경호
▲ 경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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