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
가을과 겨울 사이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8.11.20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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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해가 막 산 너머로 떨어지는 시간, 이 시간이면 나는 늘 엄마가 그립다. 어디선가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외침이 들리는듯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나의 어린 시절, 이 시간은 마을 집들의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하늘로 이어지고, 친구들은 그 연기 나는 집 속으로 하나 둘 사라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푸짐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은 저녁이지만 넓은 양푼에 나물밥을 비벼 다섯 식구가 숟가락 싸움을 벌이던 그때,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던 그 시간은 서로의 하루를 확인하고 위로해 주던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 시간은 먼 기억을 소환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느려지고 조심스러워지게 만들기도 한다. 어둑해지는 그 시간, 나는 어느 찻길 위를 달리는 때가 많다. 앞이 선명하지 않아 차 불빛에 의지해 보려 해도 불빛도 제 임무를 다 하지 못하게 만들어 자연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서양에선 이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했던가. 해 질 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의 경계라고 해도 옳을 것이다.

어중간한 시간의 경계, 무언가 변화가 오는 듯 보이지만 확실해 보이지 않는 것, 그로 인해 때로는 답답하기도 하고 불안하게도 만들기도 한다. 11월의 막바지, 가을이라기에는 춥고, 겨울이라기에는 매섭지 않은 지금이 두 계절의 경계이기도 하다. 어디 경계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자연현상에만 있을까.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젊다고도 할 수 없고, 늙었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 바로 오십 대, 지금 내 나이다. 몇 명의 친구들은 벌써 손자 손녀를 보기도 했다지만 할머니 소리가 참 어색하기만 하다. 오십 대에 무엇을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살아오면서 실패도 겪어보고 상처도 겪어 봤기에 쉽게 발을 내딛지도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낮고 느리게 가야 하는 어스름의 시간. 요즘 내가 걸어가고 있는 시간들이다. 가끔은 지나온 길들도 돌아보고, 땅도 보고, 길섶의 작은 푸새들도 보면서 그렇게 느리게 걸어가고 있다. 되도록 넓고 왁자한 곳보다는 한적한 오솔길을 택해 걸으려 한다. 길이 좁으면 조심조심 걸어야 하고, 사람이 없으면 자연과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그것 또한 경계를 넘어서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일 터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점 또한 또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임계점이라고 보아도 될 듯싶다. 요즘 뉴스 중 제일 많이 회자되고 있는 문제는 남녀 간의 폭력과 갈등의 문제이다. 과거 가부장제 사회에서 터부시 되었던 여성들의 존재가, 요즘 남성들에게는 매우 민감하고 불편한 존재로 부각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그것이 불편하고 귀찮다고 하여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의 갈등들이 우리 사회의 변환을 가져올지는 미지수이다. 그렇다고 앞이 훤히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등을 미뤄두어서는 안 된다. 어둠의 경계를 넘어서면 밝음이 오는 것처럼 지금, 이 어중간한 시간을 우리는 신중하고 소중하게 걸어가야 한다. 어스름의 시간, 어쩌면 그 시간은 신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의 시간일 수도 있는 까닭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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