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능소전의 딜레마
천안 능소전의 딜레마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5.10.1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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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천안·아산)

지난주 열린 천안흥타령춤축제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능소전’이었다. 상명대 연극학과 학생들이 지난해 이어 올해도 마당극을 재미있고 신나게 꾸며 내놨다. 능소아가씨 상대역인 박현수 선비가 인간 세상에서 배필을 구하려 변신한 신(神)이란 설정이 특징이다.

탄탄한 구성에 스피드한 전개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보는 내내 능소이야기 자체가 춘향전과 심청전을 적절히 뒤섞은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 공연에선 과거 급제한 박현수가 거지 행색으로 능소의 천안삼거리 주막을 다시 찾는 걸 보면서 춘향전이 번뜻 떠올랐다. 게다가 ‘어사출두’ 장면까지 넣은 걸 보건대 각색자도 춘향전과 능소전을 헷갈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능소가 오랫동안 헤어졌던 아버지(유봉소)와 극적 상봉하는 장면은 심청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안삼거리에는 원래 여러 종류의 설화가 전해온다. 그런데 1986년 민병달 전 천안문화원장의 ‘천안삼거리 능소전’(천안문화원 발간)이 나오면서 어느 순간 삼거리 설화가 능소전으로 동일시돼 버렸다. 하지만 능소전은 또 하나의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당시 이종찬 문화원장은 1992년 능소전 3쇄(刷) 발간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문화원에서 고장의 전설을 정립하기 위해 2년여 걸친 노력 끝에 소설로서 그 결실을 보게 되어 그 초판이 발행된 후 시민들의 놀라운 관심과 요구에 그 수요가 넘쳐….” 분명하게 능소전을 소설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예전부터 전해오는 설화로 탈바꿈했다. 그 이유는 뭔가? 첫째, 저자는 책 서문에서 소설임을 명시하지 않고 “설화들이 아주 소멸되기 전에 문자란 도구를 빌려 오래오래 간직하고자 붓으로 옮겨본다”고 말해 은근히 설화를 기반으로 했음을 내비치고 있다.

둘째, 박현수를 실존 인물처럼 그렸다. ‘전라도 고부’ 선비로 ‘영조 임금이 재위하시던 정묘년’ 과거에 응시했다고 서술했다. 영조 정묘년은 1747년(영조 23년)인데 이때 과거시험은 있었지만 합격자 명단인 국조방목(國朝榜目)에서 박현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소설을 쓰면서 정확한 햇수를 명기하고 지역까지 특정해, 사실감을 높이려 한 게 ‘잘못된’ 신뢰감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한 향토사학자는 2년 전 능소전의 주인공 이름들이 64년 개봉 영화 ‘천안삼거리’에서 따온 것을 지적했다. 천안출신 김석야씨(가요 ‘하숙생’ 작사가)의 시나리오에 능소는 물론이고 박현수, 유봉소, 삼례(주막 여주인)가 등장했다.

천안시는 3개월 전 ‘능소와 박현수 이야기’ 스토리텔링 등을 공모해 최근 마감했다. 상금 1800만원을 걸었다. 이를 바탕으로 천안삼거리공원 명소화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엉겁결에 능소전이 천안삼거리의 대표 이야기로 굳어질 조짐이다. 나온 지 30년도 안 된 이야기가 대표설화가 되는 걸 탓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춘향전과 심청전을 뒤섞은 아류”라는 비판을 받을까 두렵다. 전국적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

설화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천안삼거리의 다른 설화도 소개하면서 사통팔달 교통요지로서 많은 이가 모이던 장소였음을 부각시키는 게 나을 듯하다.

사촌형제의 훈훈한 이야기도 있다. 천안 규수와의 혼인을 서로 양보하다가 모두 서울로 올라가 과거 급제한다. 이후 이들은 천안삼거리로 내려와 기쁨에 겨워 흥타령을 부르며 함께 결혼한다는 내용이다.

천안삼거리 설화는 섣부른 정통 규정이 엄청난 오류를 부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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