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唐津)과 요트세계일주 성공이 시사하는 것
당진(唐津)과 요트세계일주 성공이 시사하는 것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15.05.1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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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一筆

드디어 내일(16일) 오후 3시가 되면 우리나라 최초의 요트세계일주라는 새로운 역사가 쓰여진다. 지난해 10월 19일 당진 왜목항을 출발해 무려 210일 동안 바다와 사투하며 4만2000㎞를 돌아 다시 우리 앞에 설 김승진 선장의 첫 마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려진대로 이번 세계일주는 단독, 무동력, 무기항, 무원조 항해로 상징된다. 말 그대로 김승진 선장 혼자서 오직 바람에만 의존해 단 한 번도 육지에 정박하지 않고 또 도중에 어떠한 도움이나 보급도 받지 않은 채 세계를 일주한 것이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변화무쌍한 망망대해에서 작은 점에 불과한 일엽편주에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게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김승진의 모험은 세월호 참사가 결정적 계기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일주를 꿈꾸며 준비해 오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국가적 비극에 온 국민들이 힘들어할 때 그는 이때다 싶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좌절과 상실의 심연에 빠져 있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의지에서다. 그래서 자신의 도전에 아예 ‘희망 항해’라는 슬로건까지 내걸었다. 

김승진의 남다른 모험은 그 자체로도 역사적이지만 이처럼 주변 모든 여건이 또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명소로 잘 알려진 왜목항은 평온하게 누워있는 사람의 잘록한 목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옛 문헌엔 와목(臥木)으로 기록돼 있다.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는 건 자연현상에서 하나된 일체감을 의미한다. 

김승진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아라파니호(號)는 순수 우리말에서 따왔다. 아라는 바다를 의미하고 파니는 달팽이를 뜻한다. 나라의 모든 현상이 오로지 속도와 경쟁으로 점철되는 현실에서 김승진은 비록 느리지만 기고 기어서 결국엔 자신만의 길을 가는 달팽이의 혼으로 바다에 몸을 맡긴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승진보다 4일 늦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또 한명의 바다사나이 윤태근이 부산 수영만에서 똑같은 요트세계일주의 장도에 올랐다. 하지만 기기문제로 3일만에 회항한 후 재차 시도에도 끝내 좌절하고 만다. 김승진과 윤태근은 이른바 이 분야의 라이벌 일 수 있지만 도전에 실패한 윤태근은 되레 김승진의 후원자를 자처해 그의 성공을 기원한다. 

이처럼 왜목이란 곳과 김승진의 세계일주 희망항해는 곧 평화와 화합과 조화와 배려와 자유를 상징한다. 위로는 부정부패, 그리고 아래로는 이기(利己)의 아귀다툼으로 너무 쉽게 사람들을 죽이고 너무 쉽게 사람들이 죽는, 그리하여 나라 전체가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작금의 현실에 대해 김승진은 지구를 한바퀴나 도는 4만2000㎞의 혼신을 다한 항해로써 그 깨우침의 사자후를 토해낸 것이다. 

이번 세계일주를 기획하고 후원한 당진시는 유구한 역사의 지역정체성을 다시 확인, 회복했다는 측면에서도 큰 업적을 하나 만들었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당진(唐津)은 요즘으로 치면 국가 글로벌화의 전진기지였다. 백제때는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모항(母港)이었고 통일신라부터는 대 당나라 해상교역의 교두부 역할을 했다.

김승진의 세계일주는 서해안 시대를 견인하는 당진의 발전상과 국제화의 추세에 그대로 부합하고도 남는다. 2012년 시로 승격한 당진은 자고나면 토박이조차 길을 모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전벽해의 변모를 거듭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김승진은 바다가 없는 충북의 청주 출신이다. 바다를 향한 우리나라 최초의 개척을 ‘충북인’이 해냈다는 점이 더욱 이채롭다. 이번 세계일주 이전에도 김승진은 생사를 넘나드는 장거리 단독항해에 도전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무풍, 폭풍, 미풍, 비바람, 이런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넘어가야만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것이 바다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비슷한 것 같아요. 많은 역경들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그런 고통들을 다 넘어서야 (비로소 하나의) 어른이 되어가듯이…”

하지만 이러한 김승진도 끝내 같이할 수 없었던 것은 침몰하는 세월호에 갇혀있던 그 어린 학생들의 절규와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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