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의 ‘역사적 인물’을 생각한다
천안의 ‘역사적 인물’을 생각한다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4.10.0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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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 <천안·아산>

다음달 9일까지 열리는 천안박물관 특별전엔 다른 곳에서 빌려온 귀한 천안 관련 유물들이 많다. 그 중 진주대첩의 영웅 김시민 장군 선무공신교서가 끼어 있다.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4년 내린 공신 증명서이다. 장군이 태어나 자란 곳이 천안 병천면 가전리다.

지난 2006년 국민 성금을 모아 일본 경매에서 구입해 진주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인 걸 어렵게 빌려왔다. 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교서를 빌리러 간 날 비가 내려 반출할 수 없다고 해서, 진주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빌려 올 수 있었다.

7일 ‘천안의 역사적 인물과 정신’이란 주제로 나사렛대와 한국기술교육대에서 천안학 강의를 했다.

한국사를 전공한데다 5년전 ‘천안 명문가’ 기획 시리즈를 연재한 인연으로 강의 의뢰를 받았다. 고민 끝에 김시민·황세득·홍대용·곽청창·이동녕 등 5명을 소개하기로 했다.

‘역사적 인물’이란 누구일까. 개인적 가치보다 집단적 가치를 위해 노력한 사람. 상식적이고 평범한 길 대신 역사가 요구하는 길을 당당히 걸었던 사람이다. 그들은 목숨 잃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국가 존망의 위기엔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직산의 황세득과 황박 장군 부자(父子). 아버지는 정유재란, 아들은 병자호란 때 장렬히 전사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목숨 구하고자 도망치는 관리들이 많다. 영화 ‘명량’서도 그런 못난 장수 하나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부자는 둘 다 60세를 넘긴 나이에 최일선에 나가 전투를 치렀다.

특히 64세의 황박은 은퇴해 고향 직산에 있다가 남한산성에 갇힌 조정을 구하러 출전한다. 수원 인근 광교산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 수많은 화살을 맞았다. 따라온 종이 피신을 권유하자 “황색 허리띠로 후일 내 시신을 찾아라”며 먼저 떠나게 한다.

‘역사적’이란 ‘역사 발전에 기여한…’ 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순방향적 역사 발전에 부합된 행위를 했어야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있다.

천안에 당대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사람이 있다. 수신면 장산리에서 태어나 그곳에 묻힌 홍대용.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고 애써 무시하던 시절, 배울 게 있으면 오랑캐에게도 배우자고 나선 북학파(北學派). 그 출발이 홍대용이었다.

1765년 북학파 지식인 중 가장 먼저 북경을 다녀왔다. 노론 명문가의 ‘귀공자’였지만 박지원과 함께 박제가, 이덕무 등 서자 출신 지식인과 어울려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 나섰다.

병자호란 원수를 갚자는 허구적 이념인 북벌론(北伐論)이 판을 치는 세상, 주자학적 명분에 잡혀 있던 조선 사회에 실용 유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천안시가 유관순·이동녕 기념관에 이어 홍대용과학관을 건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으로 곽청창이란 조선후기 여류시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병천면에서 자라 세종시 전의로 시집갔다. 4, 5세 때부터 한시를 지어 놀란 송시열이 ‘청창(晴窓)’이란 호를 지어줬다.

남존여비가 엄연했던 18세기. 당시 여성으로선 드물게 남편 묘지명을 직접 지었다. 노론의 영수 도암 이재가 이 글을 보고 “나보고 쓰라고 해도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백세를 기다려야 나올만한 글”이라며 찬탄했다. 홍대용과 곽청창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인물들이다.

가을의 길목, 천안박물관을 들러보자. 고대부터 근대까지 ‘천안인’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모은 특별전에서 위 다섯명 중 세명의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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