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존경할 줄 아는 삶
일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존경할 줄 아는 삶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4.09.18 1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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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用兵(용병)에 有言(유언)이니 吾(오)는 不敢爲主而爲客(불감위주이위객)하고 不敢進寸而退尺(불감진촌이퇴척)하리니 是謂(시위)는 行無行(행무행)이요 攘無臂(양무비)이며 ?無敵(잉무적)이요 執無兵(집무병)이니라.

禍(화)는 莫大於輕敵(막대어경적)이니 輕敵(경적)은 幾傷吾寶(기상오보)니라.

故(고)로 抗兵相加(항병상가)에는 哀者(애자)가 勝矣(승의)니라.



- 병법에 있는 말처럼 나는 감히 주인이 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그네가 되려 하며 감히 한 치를 나아가기보다는 한 자를 물러서려 하니, 이는 일 만들지 않음을 하려 하고, 팔 걷어부치기를 거절하며 적에게 함부로 덤비지 않으며 무기를 쓰는 데 신중해야 한다. /남을 가볍게 여기는 것보다 큰 화가 없으니, 남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자신의 보물을 상하게 하는 짓,/ 그러므로 다툼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을 서글프게 보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다.



= 用兵(용병)이라는 말은 ‘전쟁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글’, 즉 병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근거하여 주인이 되기보다는 나그네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보다는 열 걸음 물러서는 것이 옛늙은이의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이후 行無行(행무행)부터 執無兵(집무병)까지는 함부로 싸우려 덤비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것이 ‘화는 적을 가볍게 여기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말, 그런데 이 敵(적)이라는 말을 단순히 맞서 싸우게 되는 대상으로 읽는 것보다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모든 것, 그러니까 ‘모든 대상’이라고 읽는 것이 도덕경 전체의 흐름에 맞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곧 대상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으니 그것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을 상하게 하는 근본(幾: 본래의 뜻은 시도)이라는 겁니다.

싸움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진 쪽만 비극이고 이긴 쪽은 축제라고 생각을 하지만, 넓게 보면 이긴 쪽도 진 쪽도 모두가 비극이라는 것이 싸움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을 벌여야 하는 상황 자체를 비극으로 볼 줄 아는 그것이야말로 참된 승리라는 것이 옛늙은이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좀 더 나아가 살피면 이 가르침은 병법을 넘어서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임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대립하고 갈등하는 모든 것들이야말로 위험한 것이고, 그럴 때에 남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대상을 업신여기는 것이 무자비한 폭력의 기원이라는 말인데, 길지도 않은 인생을 그렇게 살 일이 아니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것만이 사람다운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모든 것을 존경할 줄 아는 삶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 내용의 핵심, 존경하면 아끼게 되고, 아끼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바탕자리라는 겁니다.

게다가 이 가르침은 단지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의미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삶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인식이 확보된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 ‘나는 감히 주인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나그네가 되려 하고, 한 걸음 나아가는 것보다 열 걸음 물러서기를 삶의 방법으로 삼았다’는 말에 드러나 있습니다.

가르침은 당위성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정리하여 그것을 말한 것,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려는 의도는 없고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하는 말, 문득 如是我聞(여시아문)이라고 시작되는 불경의 서두가 떠오르는데, 맥락이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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