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DOM IS NOT FREE
FREEDOM IS NOT FREE
  • 최지연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14.06.2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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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연 교수의 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교수>

6월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아름답게 둥근 보름달, 그러나 보름을 지난 16일 달은 더 꽉 찬 만월로 우리를 붙든다.

계절의 여왕 5월이 건넨 6월은 그 푸르름과 화려함이 더욱 그득하다. 초록은 짙어져 성숙하며, 꽃의 화려함은 소란스런 봄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야말로 눈부시다. 이런 절기에 이 땅의 눈부신 젊음들이 잇달아 여러 사고에 목숨을 잃었다. 누군가 4월이 잔인하다 했던가, 4월만큼이나 눈부셔서 잔인한 6월이다.

이번 주에는 민족의 비극, 6·25가 있었다. 사용하는 달력을 보니 날짜 아래 아무 표시도 없다. 어릴적 대대적인 기념행사와 함께 반공을 목소리 높여 외치던 지나친 의식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지나친 의식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늘은 기억하고 자유를 마음에 다짐할까?

개인이 역사를 잊으면 역사는 잊히지만 개인이 역사를 잊지 않으면 역사도 잊히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정전 60년, 6·25 발발은 근 65년이다. 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병사들이 10대 후반이라고 하면 그들은 이미 여든을 넘겼다. 생생한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어 간다.

얼마 전 TV에서 6.·25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방영한 적이 있다. 재일교포 2세로 조국의 전쟁에 참전한 그들은 오로지 조국을 지키려는 마음 하나로 한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대부분은 핍박과 어려움 속에 있었지만, 피땀 어린 노력으로 유수의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엘리트였다. 한국어에 서툴렀던 그들은 일본군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한국어 명령을 잘 알아듣지 못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원이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참전 재일교포 청년의 1/3만이 일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1/3은 전사했다. 남은 1/3은 ‘무단 출국자’라며 일본이 재입국을 불허했고 부산에 남아 30년 동안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돌아가지 못했기에 누군가는 불효자가 되었다.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이제 그 부모의 나이가 되어 늙어가고 있다. 또 누군가는 아내와 자식을 일본에 두고 그리워한다. 어린 딸은 자라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만나지 못한다. 젊은 그들은 조국의 자유를 위해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한 참전용사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받는 보훈연금조차도 나라 세금으로 받는 것이니 일본에서 쓸 수 없다며 매달 받는 연금 전체를 통영의 한 고아원에 기부한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단다. 죽어서 내 나라의 거름이 되고 싶으시단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늙은 몸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것, 사람의 삶은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역사이다. 마을을 둘러보고 지역을 보면 역사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역사책을 만날 수 있다. 그날을 지켜본 어린 소년이 이제는 자라서 삶을 겪어낸 좋은 스승으로 그날의 역사를 들려줄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물며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근대사에는 마을의 사람들보다 좋은 선생님이 있으랴. 돌아보자. 그들을 교실에 초청하자. 아이들을 모으고 이야기를 듣자. 이겨낸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주자. 또 자유를 지켜주어 감사하다는 마음을 건네 보자. 그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그들을 기억하자.

링컨기념관 앞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는 ‘Freedom is not free’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자유는 값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이 주간만큼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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