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공감의 정치
눈물과 공감의 정치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2.02.0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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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개그맨 이수근이 임신중독증으로 건강을 잃고 신장 이식수술을 받은 아내와 뇌성마비에 걸려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는 아들 이야기를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노라면 남을 웃기기 위해 노력하지만 속으로 수없이 울어야 했을 개그맨이라는 직업의 비애를 새삼 느낄 수 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화려한 이면 속에 감춰진 진실을 대할 때 사람은 공감하고 함께 울어 줄 수 있다. 눈물은 진실을 대변하는 가장 좋은 무기가 된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4·11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지역구의 당원과 주민을 만나는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지역 주민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당 안팎에서 부는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막으며 당명을 바꾸는 등의 대폭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앞으로의 행보가 만만치 않음은 누구나 안다. 그래서 서울까지 와서 위로를 전하는 지역구 주민을 바라보는 심사가 과거와는 완연히 달랐지 않나 짐작해 본다.

눈물을 보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의 눈물은 웅변을 대신한다. 눈물을 통해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낄 때가 많다. 이런 눈물은 장구한 논리와 화려한 언변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그래서 큐 사인에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연예인의 모습과 옷고름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 내리며 먼 길 떠나는 자식을 배웅하는 어머니의 눈물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애써 눈물을 참으며 먼 하늘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눈물 또한 차이가 있다.

우린 대성통곡보다 때론 울음을 삼키며 흐느끼는 슬픔에 더 목이 멘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우는 장면이 유독 많다. 슬퍼서 울고, 좋아서 울고, 후회하면서 울고, 오열하는 장면이 연기력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줄거리가 공감을 못 얻어도 슬픈 장면이 많이 나와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나오면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로 인식되는 일도 있다.

과거 우리는 정치인의 눈물을 무수히 보았다. 가까이는 학교급식에 시장직을 걸고 무릎 꿇고 눈물을 훔치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모습과 천안함 폭침으로 목숨을 잃은 장병을 추모하는 연설에서 눈물을 흘린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 그리고 2002년 대선에서 감성정치를 이끌어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눈물이 있다.

대개 대통령은 강한 리더십과 통솔력을 가지고 국민에게 어필한다. 그러다가 어머니 모습 같은 감성적인 모습을 봤을 때 그 색다름에 국민은 더 큰 감동을 받는다. 마치 늘 무뚝뚝하고 퉁명스런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을 때 그 감동이 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듯 눈물은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사람을 감동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다. 결국 눈물은 설득이 아닌 공감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총선이 시작되면 후보자들은 재래시장을 방문해 가까운 친척을 처음 만나듯 살갑게 손을 부여잡고 살림살이 걱정도 해주고,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는 진풍경도 벌어질 것이다. 젊은 유권자를 만나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나이 드신 유권자를 만나면 업고 동네 한 바퀴를 돌라면 돌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또한 공감정치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전체가 아닌 후보자의 단편적인 모습만 부각해 감성적으로 접근하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연예인이 어느 날 갑자기 휴지를 줍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훈남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일회성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된다.

눈물은 갖가지 사연이 녹아 흐르는 물이다. 반전도 있고, 감동도 있고, 계산된 이기심도 있다. 매서운 한파에 녹아떨어지는 콧물보다는 그래도 감동의 눈물이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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