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버는 재주들 밖에 없나
돈 버는 재주들 밖에 없나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2.01.30 2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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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인문학자들의 필독서 '논리철학 논고'로 유명한 철학자 루투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오스트리아 최대 철강 재벌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가업과 관련있는 공과대학에 입학해 기계학을 전공했고, 항공학에 심취해 영국에 건너가 비행기 엔진 개발에 주력했다. 스스로 개발한 제트 엔진의 시험 비행에 성공하는 성과를 일궜지만 이내 수학과 철학으로 방향을 틀고 평생 학자의 길을 걸었다. 멘토였던 버트런드 러셀은 루투비히를 '가르치려던 모든 것을 순식간에 깨우쳤던' 천재라고 평가했고, 경제학자 케인즈는 그가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초빙돼 왔을 때 "5시 15분 기차로 신이 도착했다"고 말했다.

부친이 작고하면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루투비히는 일약 유럽의 부호로 떠올랐지만 물려받은 전재산을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예술인·작가 등을 후원하는데 써버렸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당시 그의 도움을 받았던 예술인들 중 한명이다.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재직하기 전 한때 초등학교 교사와 정원사 보조로도 일했다고 하니 나중에 유산을 포기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던 모양이다.

루투비히의 학자적 성취는 자식들에게 가업을 잇게 하기 보다는 저마다 재능과 소망을 좇아 자유분방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기풍에서 비롯됐다. 루투비히의 아버지 카를은 무려 8남매를 두었지만 누구에게도 가업 승계를 강요하지 않았고, 실제로 아들들은 모두 제 갈길을 걸었다. 형인 파울은 저명한 피아니스트로, 큰 누나는 화가로 활동했고, 또 다른 형인 쿠르트는 장교로 복무하다 전선에서 자살했다. 번 돈도 품격있게 썼다. 로댕과 브람스, 클림트, 쇤베르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인들을 재정적으로 적극 후원했다.

자식들은 국가에서 부여한 의무도 철저하게 수행했다. 3형제가 군에 입대해 1차대전에 참전했다. 형들은 전장에서 불구가 되거나 생을 마치기도 했다. 루투비히도 각종 전투에 참가하고 이탈리아군에 포로로 잡히는 시련을 겪은 끝에 장교로 승진하고 무공훈장도 받았다. '논리철학 논고'가 동부전선 참호 속에서 집필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을 장황하게 언급한 것은 한국의 재계 2·3세들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대부분 국내외 일류 대학에서 그럴싸한 전공들을 이수했지만 이런 배움을 사회에 제대로 써먹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다. 경영권 대물림을 위해 주력 계열사에서 경영수업을 쌓는다는 2세들은 양반이다. 이들외 대다수는 돈벌이에 집착한다. 그것도 그룹이 보유한 유통망을 기반으로 사업을 구축하고 확장하는 그야말로 땅집고 헤엄치기 식으로 사업을 벌인다. 명품산업이나 서비스업 등에 진출해 명품 브랜드나 외제차 수입에 열을 올리고 학원과 커피점, 빵집에도 진출한다. 여기까지도 양에 안차 두부와 콩나물, 청국장과 순대에까지 손을 대며 중소상인들의 밥줄을 죈다. 그래서 터진 것이 최근 동네 점포들과 충돌하며 빚어진 '빵집 전쟁'이다.

순진한 생각을 해본다. 재벌집 자제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그렇게도 재주들이 없을까. 명문가에서 지향한다는 판검사나 의사가 재벌가에서 나왔다는 소리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 같은 학자나 예술인은 고사하고 가업 이외의 분야에서 영역을 구축하고 기여하는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식들을 비정한 장사치로 키우며 내수시장을 철저하게 독과점해서 얻을 것은 99%로부터의 고립과 갈등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국에서 기업가가 혁신적인 기술을 갖고 사업을 시작하면 재벌이 이를 인수해 회사 직원과 자산을 빼앗아 버린다"며 "한국 정부와 정치인들이, 재벌들이 벤처 기업가의 혁신 의욕을 꺾고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구조적 문제는 도외시한 채 사소한 '빵 사업 영역 문제'에 치중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맞는 얘기지만 벤처기업 잡아먹는 것은 차치하고 서민들의 터전인 골목 상권만이라도 넘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이 나라 중소상인들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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