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적 정치문화 청산해야
후진적 정치문화 청산해야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0.05.24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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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편집부국장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맞붙은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불과 3년전 북한의 노동적위대에 필적하는 준군사조직 육성을 목표로 창설한 예비군을 완전 폐지하겠다는 공약은 반공이 국시였던 당시 분위기에서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는 즉각 정권의 역공을 받았다. 예비군 폐지는 이적행위라는 것이었다. 북의 예비군 격인 노동적위대의 전력부터 공개됐다. 규모는 130만명, 장비는 현역보병 수준이라고 했다. 기동력도 뛰어나 72시간 내에 동원돼 전선 투입이 가능하다는 점도 강조됐다. 당시 국방장관은 예비군을 폐지하면 20개 정규사단을 만들어 공백을 메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비군 폐지 공약은 김일성의 남침을 유도하는 이적행위인 만큼 즉각 철회해야 한다는 성명까지 나왔다.

여당이 위기감을 조성하며 불을 붙인 안보논쟁은 야당진영을 위축시켰고, 급기야 김대중은 한 달 만에 이 공약에서 후퇴했다. 예비군을 폐지하되 '향토방위대'를 만들어 대체하겠다고 수정한 것이다. 이번에는 향토예비군이나 향토방위군이나 그게 그것 아니냐는 반론에 시달려야 했다. 선거가 임박하자 김대중은 다시 '예비군 완전폐지'로 회귀했지만 여권의 공세를 받고 우왕좌왕하는 과정에서 받은 타격은 컸다.

당시 중앙정보부도 한 건을 터트려 북풍을 거들었다. 재일동포 유학생 서승, 서준식 형제 등 10명에 대해 간첩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김대중은 당수인 유진산을 넘어선 후 함께 '40대 기수론'을 펼치며 당의 주류를 장악한 김영삼과 이철승까지 제치고 후보로 지명됐다. 웬만한 국회의원 집 숟가락 수까지 파악했다던 당시 중앙정부보도 예상하지 못했던 뉴 페이스였다.

하룻강아지를 만난 셈이니 일찌감치 박정희의 압승이 예상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여니 결과는 달랐다. 박은 634만2000여 표, 김은 539만5000여 표를 얻었다. 표차는 94만여표에 불과했다. 박정희에게 150만표 차 압승을 안겨준 경북과 경남이 아니었으면 한국 현대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박정희는 신출내기에게 고전한 것이 못내 억울해 이기고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김대중이 예비군 폐지 공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어땠을까. 요즘도 회자되는 의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 박 정권의 안보공세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여·야가 공통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선거 후 신민당은 박정희가 히든카드로 내놓은 '마지막 출마' 선언 등 네 가지 주요 패인을 내놓았지만 북풍은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김대중의 예비군 폐지공약을 둘러싼 여야의 안보논쟁은 북풍의 원조라면 원조 격이다. 스스로 자초한 북풍이었다는 점에서 이후의 북풍과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이후 북풍논쟁은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됐고 때로는 진보정권이 북풍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북풍은 여론의 역풍을 맞으며 실패작으로 끝났다.

유권자 입장에서 북풍은 그 자체로 자존심 상하는 말이다. 유권자의 의식을 조작과 유도가 가능한,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 수준으로 깔보는 정치권의 오만한 시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천안함 사태를 둘러싸고 안보논쟁이 재연되고 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빌미를 제공한 여권이나, 관성적인 대응으로 이념적 전선을 키우고 있는 야권이나 전략적으로 궁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40년 전 반공의 기치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도 무위에 그쳤던 것이 북풍이요 안보논쟁이다. 이제는 이 후진적 정치문화를 청산해야 할 때다. 어느 때보다 유권자들의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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