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명함
선거명함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4.28 22: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도담학원 원장>

주말이면 등산로 입구엔 명함을 나눠주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선거 때가 가까워 온 것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다. 여러 사람이 각 당 후보의 명함을 주니 차마 버리지 못해 받아 쥔 손엔 명함이 가득하다. 발길을 돌리면 바닥에 흩어진 명함이 쓰레기가 되어 바람에 날리고 그 위로 무수한 발자국이 지나간다. 집에 돌아와 주머니 속에 있는 명함을 꺼내 찬찬히 살펴본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지난 선거에 익은 얼굴들이다. 빼곡히 들어선 경력을 보니 요즘 유행하는 말로 '스펙'을 제대로 쌓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 전체가 애도기간이라 엄숙하고 웃음소리도 삼가는 분위기라 축제의 분위기로 들썩여야 할 지방선거가 썰렁하다. 자신을 홍보할 기회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명함을 돌리고, 목 좋은 곳에 플래카드를 걸어 놓는 것이 전부다. 현직에 있는 군수가 공항에서 줄행랑을 쳐 공개수배를 당하고, 한 명은 뇌물수수로 구속 수감되었다는 소식에 쓴웃음만 나온다. '풀뿌리 민주주의', '민주주의 학교'라 일컫는 지방자치제도가 왜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복마전으로 변한 것일까

역사적으로 지방 토호(土豪)세력과 권력과의 유착은 뿌리가 깊다. 중앙집권 군가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고려 태조는 기인제(其人制)를 통해 지방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불러들여 머물게 하는 제도를 도입해 지방 호족의 발호를 막으려 했다. 이것은 신라 때 상수리(上守吏)제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지방 향리의 세력을 회유. 억제하기 위한 제도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중앙집권이 강화되어 지방 토호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지방 양반들을 중심으로 한 향리층이 대두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유착관계를 맺어 백성을 수탈했다. 그래서 지방 토호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실시한 정책 중 하나가 관리를 출신지에 파견하지 않는 상피제(相避制)다.

지방의 현안들을 잘 알아 국민의 복지와 권익에 힘쓰라고 만든 제도가 지방자치제도다. 그러나 이것이 왜곡되어 관리 감독을 해야 할 단체장과 의원들이 각종 이권에 연루돼 구속되어 지방자치의 본래 의도를 퇴색시키는 현실은 고려 때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인 줄도 모른다. 정책과 인물로 인재를 뽑는 것이 아니라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사람을 선택하는 풍조가 만연된 우리나라에서는 필연적인 결과다. 어느 지역을 한 정당이 싹쓸이하는 지역주의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고, 그것에 기대어 표를 구걸하는 정당의 형태 또한 달라진 것이 없다. 중소 도시의 특성상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한 지역에서 나오면 한 다리 건너면 선후배요. 각종 시민단체, 봉사단체, 문화 단체 활동을 해 웬만하면 구면(舊面)이 된다. 지역의 건설업자나 각종 이익단체도 선후배와 동향이라는 끈끈한 정으로 결속돼 그만큼 유혹이 큰 것도 사실이다.

공천을 받기 위해선 철새처럼 당적을 정치적 상황에 따라 쉽게 바꾸는 것도 문제다. 이 당 저 당 기웃거리며 당선 가능성이 큰 당에 눌러앉는 인사에게 정치적 소신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공천과정에서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당선 가능성만 있으면 공천장을 남발하는 중앙당의 처신도 문제가 있다.

선거철마다 꽃 노래 부르듯 국민을 현혹하는 문구와 검증되지 않은 삶의 이력을 작은 명함을 통해 들여다 본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것이 정치판인 줄은 알지만, 이번 6.2 지방선거에서만큼은 제대로 가려내 시민과 군민을 낯부끄럽게 하는 인사들이 더는 나오지 않게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