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기 곧추세운 3·1공원
민족정기 곧추세운 3·1공원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3.02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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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강태재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2010년 3월 1일 삼일절 91주년을 기하여 청주3·1공원이 새 모습으로 거듭났습니다. 3·1공원이 조성된 지 30년, 친일 변절자 정춘수 목사의 동상을 끌어내린 지 14년, 마침내 3·1공원이 제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정의로운 자는 그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하고 불의에 영혼을 팔아 버린 자는 지탄을 면치 못한다. 우암의 산 그림자 서편에 기울고 무심의 맑은 물 비단처럼 비치는 여기 정의가 살아있는 삼일공원이 있다."로 시작되는 청주3·1공원 중수기는 김승환 충북대 교수가 짓고 이희영 서예가가 쓰고 다산애드콤(대표 이종태)이 시공했습니다. 볼썽사납던 변절자의 동상좌대를 치운 자리에는 충북의 3·1운동을 상징하는 횃불조형물이 자리하고, 다섯 분 동상을 둘러싼 부조벽화는 충북 민중의 독립만세운동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박걸순 충북대 교수의 '충북지방의 3·1운동 연구' 논문에 따르면, 충북지역의 3·1운동은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청주에 배포되어 여러 차례 시위를 꾀하였으나 사전 발각되는 등 일본관헌에 의해 저지되다가 3월 19일 괴산읍 장터에서 홍명희 등의 주도로 본격적인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4월 19일 제천 송학 시위까지 만세함성이 그치지 않았는데, 당시 충북지역의 시위는 경기지역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충북의 만세시위는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장날에 주로 이루어졌는데, 장터나 관공서 주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일본관헌의 체포 연행에 맞서 낫 곡괭이 몽둥이 돌멩이 등을 들고 경찰주재소나 면사무소를 습격 파괴하는 등 강압적인 식민통치와 무력진압에 격렬히 대항하였습니다.

충북지역의 3·1만세운동은 유학자와 젊은 농민과 학생층이 주도했는데, 낮의 시위뿐 아니라 밤에도 횃불만세라는 독특한 시위를 전개하여 일본군경의 무력진압에 직접 맞서기 어려운 노약자들까지 참여했습니다. 남녀노소가 밤에 주변 산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거나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독특한 '횃불만세'운동은 인근 충남, 강원, 경기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허원 서원대 교수는 '충북지역의 3·1운동' 명문(銘文) 말미에 "충북의 3·1운동은 도내전역에서 50여 차례 수만 명의 민중이 참여하여 수백 명의 인명피해를 냈지만 1910년대 후반 의기소침하던 의병운동의 맥을 살려 새로운 민족독립운동의 깃발을 올리면서 1920~30년대 한국민족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1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이 운동을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켜 세계의 이목을 집중케 한 것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이 땅의 민중들이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제 제 모습을 갖춰 민족정기를 곧추세운 청주3·1공원은 자라나는 어린이부터 청소년 학생 그리고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역사공원으로서 산 교육장이 되고, 시민들의 다양한 문화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면서 하나 더 해야 일은 3·1공원 정비를 계기로 하여 충북의 3·1운동의 성격과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한 관련 학계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학술조사와 연구 작업이 이루어져 체계적인 저술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은 3·1공원 정비사업이 민관 협력으로 이뤄졌던 것처럼, 충청북도 당국이 예산과 행정을 지원하고 학계 및 시민사회의 참여로 진행됨이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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