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의 끝자락에서 자유!'를 생각한다
이 해의 끝자락에서 자유!'를 생각한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12.2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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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덕현 <본보 편집인>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방기곡경(旁岐曲逕)이 참으로 유별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샛길과 굽은 길을 뜻하는, 의역하면 정당하고 당당하게 일을 추진하기보다는 그릇된 수단을 써 억지로 하는 것을 비유한다니 당연히 좋은 말은 아닐 듯싶다. '소인배는 제왕의 귀를 막아 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방기곡경의 행태를 자행한다'고 쓴 율곡 이이의 동호문답이 원전이라는 해석을 접하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한 사람의 이름이 퍼뜩 머리를 스쳐갔다.

아울러 넓고 똑바른 길을 굳이 외면한 채 샛길과 굽은 길을 헤매면서 지금 한겨울에, 모진 한파를 맞고 있는 그의 처지를 잠깐 고민하는 순간, 그에게 자유를 박탈한 사람의 얼굴까지 동시에 오버랩됐다. 지금으로선 총리라는 자리의 무화과가 자칫 금단의 열매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교수들이 사자성어를 통해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세종시는 물론, 4대강 사업과 미디어법, 그리고 국회의 예산심의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하고 국민들을 피곤하게 하는 탈(脫) 이성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굳이 헤겔의 정(正) 반(反) 합(合)을 갖다 붙인다고 해도 지금의 현상은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기엔 버겁기만 하다. 샛길과 굽은 길이 조만간 우리를 낭떠러지로 인도할까도 두렵다.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건, 골목에서 매일 매일 휴지를 주워 생계를 잇는 노숙자이건 하나같이 갈구하는 건 좋은 세상이다. 곧 자유의 삶이다. 자유는 주인된 자의 권리이고 도리이자 행동이 아닌가.

하지만 사람들은 자유를 추구하다가도 곧잘 방종과 풍요의 덫에 빠져 신음한다. 이는 물리적 이익을 취하려다 되레 정신적 풍요로움을 고사시킨다는 역사의 교훈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풍요와 안전이라는 가림막으로 자유를 억압하려는 권력자들의 탐욕이다. 과거의 자유는 ~부터의 해방이었지만 지금의 자유는 ~를 향한 의지이자 외침이다.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파시스트들도 언제든지 자유주의자로 행세하며 세상을 요리하려 한다.

이럴 경우 시대의 지배적 구조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은 기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닌 지금, 촛불집회가 대중들이 모여 있을 때만 충동적으로 나타나는 집단 히스테리쯤으로 매도되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하지만 민중의 저항과 항거는 늘 역사발전의 곁에 있었다.

정부가 광주 5.18 기념식장에서 이른바 민중가요인 '님을위한행진곡'을 퇴출시키려다 여론의 역풍을 맞고 한발 뺐다. 국민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통해 새로운 5.18 노래의 제정여부를 가린다고 했지만 제대로 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모든 노래는 그 시대의 정신과, 분위기와 사회적 트렌드를 가지고 태어난다. 만약 과거 민주 대 반민주가 국가적 어젠다를 짓누르던 7, 80년대에 갑자기 소녀시대가 나타나 gee gee gee를 불렀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미친 X'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거다. 님을위한행진곡을 없애려면 무려 40년이 다 되도록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새마을 노래와 예비군가도 뜯어 고쳐야 마땅하다.

그렇다! 어느덧 우리는 다시 자유를 고민하게 됐다. 그중에서도 평등권적 자유, 용산 참사의 죽음과 사격장의 일본인 죽음이 똑같이 평가되지 않는, 그래서 어느 일방의 자유확장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만고불변의 민주주의 진리를 다시금 되뇌이게 됐다.

이젠 정운찬에게, 그리고 우리 충청인들에게 자유를 줘라. 냉동창고에 꽁꽁 얼려있는 용산의 그 서러운 혼들도 더 이상 속박하지 마라.

그래서 2009년 끝자락에, 다시 부른다.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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