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고집과 1000만원
황소고집과 1000만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9.2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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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청주시 신봉동에 있는 우시장(가축시장)엔 아직 장날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2자와 7자가 들어있는 5일마다 어김없이 들리는 새벽 소 울음소리는 추석을 앞둔 요즘, 아련한 향수를 새삼 자극한다.

예로부터 우리는 소를 우리의 심성과 가장 닮은 가축으로 여겨왔다.

현대식으로 잘 닦여진 무심천 둔치 아스팔트길을 걸으며 듣게 되는 닷새마다의 소 울음소리는 그러나 서글프다.

논밭을 갈고 무거운 짐을 도맡으며, 심지어 제 몸을 팔아 생활의 위기를 모면하게 했던 소는 이제 이미 옛날의 제 모습을 잃었기 때문이다.

일소를 찾는 이가 거의 사라져 버린 우시장의 새벽.

살아있는 소들은 대부분 식용으로 넘겨질 테고, 이를 아는지 그 녀석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처연하다.

한우고기라는 보통명사에 군침을 삼키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어느 사이 본질이 바뀌어 버린 소의 처지를 생각하며 걷는 무심천 길은 쉽게 무심할 수 없다.

하여 생각은 소를 타고 다닌 일화로 유명한 조선 초기의 정승 황희에게로 옮겨가는데, 여기서 또 황소고집의 유래가 된 옛이야기가 각별하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유명한 관리였던 황씨가 소를 타고 지방을 유랑하던 어느 날,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던 어느 작은 고을의 관리 소씨가 그를 기다려 한 상 거하게 그를 대접하려 했다. "내 평소에 그대의 명망을 듣고 뵙고 싶던 차에 오늘에야 비로소 만나게 됐으니 부디 이 소박한(?) 밥상을 받아 달라"는 소씨의 간청이 있었고, 이에 맞서 황씨는 "한때 관리의 위치에 있던 자가 공사를 막론하고 과한 대접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이 둘은 서로 말다툼을 하게 되고, 그 다툼과 대립은 사흘이상 이어지면서 음식은 다 상하고 둘 다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어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황소고집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생겨났다.'

고집과 농사일의 상징이던 소는 이제 그 본질이 바뀌었고, 그 세태의 변화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분간할 수 없다.

다만 한때 명망있는 학자의 신분에서 국무총리 후보로 괄목상대한 정운찬씨가 어느 기업인으로부터 '궁핍하게 살지 말라'며 받았다는 1000만원 정도의 소액(?)은 그 옛날 소씨의 거한 밥상 대접과 본질이 다른 것인지 신새벽 소 울음소리에 더욱 궁금하다.

한국사회학회는 최근 <사회학 르네상스>를 발간하면서 그 시리즈의 첫 권으로 '한국사회 도덕성 살리기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붙여 대한민국은 도덕적인가 라는 제목의 책(도서출판 동아시아·2009)을 출간했다.

우리 고장 청주대학교 김미숙 교수가 편집위원장을 맡은 이 책 서문에서 김 교수는 '도덕'을 첫 번째 주제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물질적으로는 과거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지만, 국내·외를 불문하고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황폐하거나 여유를 잃고 방황하는 가운데 비윤리적·비도덕적 사회분위기에 찌든 현대인이기도 한 것에 착안,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기 점검 또는 자기반성의 계기로서 <씻김굿>을 기대한다"고 밝히고 있다.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우리는 관행처럼 소고기를 선물하거나 선물 받을 것이며, 오랜만에 맛보는 토란국의 육수이거나 산적으로 잘 구워진 소고기의 맛에 침을 흘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소와 고기소의 구분은 무모할 것이며, 게다가 그 잣대에 인간의 욕망이나 도덕성 운운하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다만 인간과 소는 같을 수 없으며, 높은 사람의 도덕성은 시민과 서민의 그것보다는 보다 엄격해야 함은 분명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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