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 장
완 장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7.06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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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덕현 <본보 편집인>
   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이 졸지에 '완장'이 됐다. 얼마전 진보 논객 진중권이 유인촌 문광부장관을 향해 "양촌리 용식이가 완장을 찼다"고 비꽈서 말한 것이 발단이 됐다. 각료 중에서도 유독 튀어 보이는 유 장관이 그들의 시각에선 좌파로 분류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옥죄는 과정이 반대 쪽 사람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사실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유인촌이 연기한 양촌리 용식이는 비록 농투성이였지만 자기 할 말은 다하는 칼칼한 캐릭터로 기억된다. 이런 용식이가 우리나라 문화코드의 최고 책임자로 나섰으니 어느 정도는 파열음이 날 만도 하다.

완장은 일종의 표지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차는 순간 사람들은 참으로 묘한 기운을 느낀다. 본질은 망각되고 엉뚱하게도 선민(選民) 의식이 먼저 부각된다. 하다못해 초등학생들도 주번 완장을 차는 순간 목소리가 커진다. 특정인에게 완장을 부여할 땐 무엇을 책임지라는 의미가 우선인데도 현실에선 일종의 '끗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조직의 책임자나 힘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에 측근을 두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의 분신 혹은 절대적인 지지자를 끼고 있어야 모든 게 원활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측근들이 오버하는 순간 곧바로 완장의 병폐가 드러난다. 주군을 팔아 호가호위하는 완장들이 설쳐댈 경우 그 구성원들은 피해망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조직은 당연히 위기대처에 취약할 수밖에 없고 때가 되면 저절로 붕괴된다.

이는 성공한 리더와 실패한 리더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둘 다 조직 관리에 측근을 앞세우지만 성공한 리더는 절대로 완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측근에게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주다가도 어느 시점이 되면 반드시 견제를 가한다.

우리가 완장을 경멸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 말로가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효용성이 떨어지면 스스로 도태되거나 제거된다.

83년 발간돼 TV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끈 윤흥길의 소설 '완장'은 이를 잘 묘사했다. 임종술이라는 별볼일 없는 동네 깡패가 저수지 주인에 의해 관리원으로 고용되면서 안하무인의 횡포를 부리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단물을 다 빨아 먹은 주인에게 버림받고 야반도주하기에 이른다.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중국 문화혁명의 최대 완장격인 홍위병 역시 끝내는 그들의 배후조종자였던 모택동과 4인방에 의해 토사구팽의 운명을 맞는다. 전국을 광풍으로 휩쓸며 혁명을 전파한 후 이젠 됐다 싶어 주군을 만나려 했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비열한 배신과 버림이었다.

잘 알다시피 6·25전쟁 때 시골 같은 곳에선 북한군보다도 이들 완장에 의한 피해가 더 컸다. 엊그제만 해도 마름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인민군 완장을 차고 저지른 만행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야사로 전해지고 있다.

진보쪽의 주장대로 유인촌이나 최시중이 MB의 완장이라는 데는 아직 공감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런 비판을 쉽게 넘길 상황은 분명 아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문화'로 통칭되는 국가정책의 핵심 브레인이라는 데서 그렇다. 문화의 일방통행 이른바 획일성은 총칼보다도 무섭다. 과거를 되돌아 봐도 굴절된 역사는 문화의 일방적 휩쓸림과 왜곡에서부터 출발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인종청산도 그 당위성에선 철저하게 문화로 포장됐고 그 폐해는 고스란히 인류의 비극으로 남았다.

지도자가 자기 세력이나 지지자를 꿰차려고 하는 욕망은 정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성보다 훨씬 강하다. 이는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인지상정의 원리이지 결코 논리가 아니다.

이럴 때 진정한 완장이라면 주군에 앞서 절대로 오버하지 않는다. 충언과 고언을 하지는 못할 망정 부추기고 선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같은 완장이라도 박철언이나 박지원보다는 문재인을 더 원한다.

그래야 완장이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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