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스승
무언의 스승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6.1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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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영의 에세이
김우영 <소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은 번영의 장식이며 가난의 도피이며 노년의 양식이다'라고 했다. 송나라 진종 황제는 '글을 읽어야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고, 좋은 논밭도, 좋은 집, 좋은 종도 다 글 가운데 있다' 고 하였다. 책을 통해서만이 진솔한 삶을 깨치고 인생의 지혜를 짜낼 수 있다는 옛 성인들의 말이다.

나는 지금도 현실에 허덕이며 살고 있고, 앞으로도 주관과 삶에 개념이 바뀌지 않는 한 이 생활의 연장일 것이다.

지난날 언제이던가. 어둡고 긴 젊은 날에 그래도 작은 빛이 되어 내일의 삶을 헤아리게 한 것이 바로 책이었다. 답답하고 지루한 나날 속에서 그 시름을 잊고자 손에선 책이 떠나질 않았다. 마구 부딛치는 냉엄한 현실을 용해시킬 만한 힘이 없는지라 도피의 일환으로 책을 들고 산이나 들에 누워 시름했었다.

그때 섭렵했던 책들은 비교적 수양서 쪽이었다. 홍자성의 '채근담', 데카르트의'방법서설', 알랑의'행복론', 안병욱의'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등이다.

뒤늦게나마 독후감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50여 편의 내용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 독후감 노트를 펼쳐 보면 당시의 생활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젊은 나날에 왜 그리 먹장구름은 절망도 좌절도 많이 했던 시절에 당시의 고통을 뛰어넘어 파란 내일을 헤아릴 수 있게 했던 힘은 아마도 무언의 스승인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 같다.

절망하는 시간들의 어려움도 책 속으로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무한한 지적호흡이 생기 있게 숨쉬었다. 어린 나이라도 책이란 참 편리하고 좋은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미래상을 놓고 방황하던 그 시절에 책을 대하지 않았다면 삐뚤어진 사고에 빗나간 생활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책 속엔 진리의 말씀이 있고, 슬기의 샘터가 있고, 이론의 공장이 있고, 뮤즈의 노래가 있다

고 안병욱님은 정리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으려는 공리적인 목적도 있지만 나로서는 독서삼매를 즐기려는 목적도 크다. 책 속에 펼쳐지는 무한의 공간속에 함께 살며, 그것과 더불어 영원을 호흡하는 충만감 - 이것이 독서의 목적이요, 즐거움이다.

남아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五車書)의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교양인은 책을 소에게 실으면 그 무게로 소가 땀을 많이 흘릴 정도여야 한다고 한다.

항상 반복되는 획일적인 생활 속에서 지식과 정서의 갈증을 어디서 풀 것인가. 책을 통한 충만감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좋은 독서가 우리 주변에서 자꾸만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나라 독서 인구는 1년에 1인당 평균 1권인데 일본은 13권, 미국은 45권이다. 너무 책을 안 읽는 국민이다. 지척 앞의 '시각문화' 보다 '정신문화'경시 풍조가 심해지는 것은 산업 사회의 소산인 듯하다. 환경적 제도도 문제라 생각한다. 외국의 경우는 1백3명당 도서관이 12개가 있다 하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옛날 성현들은 가정에 3가지 즐거운 소리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아기울음소리요, 둘째는 베 짜는 소리요, 셋째는 책 읽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차 안에서, 일터에서 손에 손에 책을 들고 사는 생활이 만연된다면 정서가 풍요를 이루어서 사회에 오늘날 같은 메마른 사건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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