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쓰는 편지
3월에 쓰는 편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3.05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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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K형. 어느 새 3월의 선한 기운이 화사하게 열리고 있습니다.

새싹 같고 병아리 같은 입학생들은 아직 상기된 낯빛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일찍 순을 내민 봄풀들은 봄을 시샘하는 늦눈에 놀라 잔뜩 몸을 움츠립니다.

지난주에는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아니 차마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짧은 2월을 보내면서, 떠나보내는 일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런 별리(別離)에 길들여지지 못함은 여전한가 봅니다.

그 사이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을 겪었고, 그분의 숭고한 사랑을 다시 되새기는 장렬함이 새삼스럽기도 했습니다.

세상사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그런 세상 속의 번민과 고뇌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경계쯤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부녀자를 무차별 살해한 한 범죄자를 두고 사이코패스(psychopath)라는 범죄심리학 용어에 길들여지면서 끔찍한 반사회적 인격 장애에 치를 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글을 쓰기 두려웠던 것은 유별나게 친절한 경찰의 기삿거리 제공과, 이를 별다른 고민없이 받아쓰는 언론의 무신경에 대한 우려를 눈치 채고도 말하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게다가 흉악하기 그지없는 범죄에 대해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추리소설의 하나쯤으로 거리두기를 하면서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도 글쓰기를 궁핍하게 합니다.

아! 그리고 그때. 그 잔혹한 범죄가 어떤 의도와 방식으로든 간에 여론을 호도하고 반전시키는 시도로 작용됐으며, 그런 용렬함에 현혹되었던 백성의 무지몽매함이 끝내 나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 사이 죽어간 용산의 이름들을 불러보지도 못하고, 그들이 왜 죽었는지 그리고 그런 일들이 왜 벌어졌으며, 그게 살아가는 내내 나와는 무관한 일이 될 것이라는 가당치 않은 발상은 또 어디서 생기는 만용입니까.

글을 쓰고, 또 그 글이 여러 사람에게 읽히도록 지면을 할애 받은 처지가 참으로 가당치 않은 나날입니다.

그런 불편한 날들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지금껏 글쓰기를 주저하게 합니다.

지난주는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편집진과의 엄연한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둘러 변명하며 한 주를 건너 뛴 지금 변한 건 별로 없습니다.

아니 그 사이 또다시 과연 우리가 얼마나 도덕에서 멀어지는가를 시험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입을 얼어붙게 하고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난장판 국회는 정치에 대한 은근한 혐오를 부추기는 듯하고,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데 모두가 내 일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입니다.

학교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기필코 키 재기를 해야 하며 서열과 등급을 통해 우열을 가려야 하는 교육정책이 과연 절실하게 적용돼야 하는지를 따져 보는 것은 이미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짓과 조작이 버젓이 벌어진 초·중학교 일제고사 결과 발표의 씁쓸함을 우리 자녀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평가가 모순과 처짐의 원인을 진단하면서, 이를 개선하는 자료가 되는 대신, 이를 통해 순위를 매기는 수단으로만 전락하는 현실도 서글프지만 그보다는 어른들의 거짓이 여과 없이 우리 자녀들에게 투영되는 교육현실은 차라리 비극이 아닐까요.

그런 저런 이유로 글을 쓰기가 두렵고, 말을 하기가 서글펐던 2월은 가고 이제 3월은 점차 사람과 자연을 부풀게 합니다.

애써 할 말을 했다고 자위하는 3월은 그런대로 모두에게 희망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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