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소고
죽음에 대한 소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2.18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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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이수한 <모충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한국 천주교회의 큰 어른이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셨다.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시절 한 가닥 희망의 빛으로 우리 가운데 우뚝 서 계셨던 그분이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이제 그분은 세속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그분이 믿고 행동했던 대로 지금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한번 태어난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따라서 죽음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몹시 꺼리며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즉각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이, 가장 무서운 일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죽음이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이요, 가장 무서운 일일까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그 이별의 대상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이별은 분명 슬픈 일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더더욱 슬픈 일이다. 더구나 "죽음은 죽은 자를 영원히 되돌려 주지 않는다."는 말처럼 죽음은 잠시의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이별을 가져오기에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다. 죽음은 바로 존재하는 나를 존재하지 않는 무(無)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태어나기 전에는 없었고 죽음 이후에는 더더욱 없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실제이다. 결국 죽음은 일체의 모든 것을, 나의 전 존재를 삼켜 버린다. 이는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경험해야 할 숙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죽음은 가장 슬프고, 가장 무서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음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허무한 무(無)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감추어져 있는 그 무엇, 즉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의미에서의 무(無)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확신할 수 없기에 조심스럽게 걸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모습과 같다 하겠다. 그 어느 것도 증명할 수 없고 따라서 확신할 수도 없다. 다만 선택하여 믿을 뿐이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른다하여 내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메뚜기가 내년을 모른다하여 내년이 없는 것 또한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음 이후를 모른다하여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사람들은 죽음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생각한 나머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려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어찌 보면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 죽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따라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존재이다.

또한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다가오는 죽음은 인간을 가장 평등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태어나는 순간부터 늘 내 곁에 머물다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케 하는 죽음을 나는 감히 '친구'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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