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암리 고분군은 누구의 무덤이었을까요?
누암리 고분군은 누구의 무덤이었을까요?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16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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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서 나누는 충북의 문화이야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요 그런데 죽은 자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있다. 그것이 바로 무덤이다.

충주시 가금면 누암리 뒷산에는 230여 기의 무덤이 무리지어 있다. 무덤이 떼 지어 있다고 해서'고분군(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무덤들은 도굴로 많이 파괴된 채 발견되었다.

1990년대에 발굴 조사단이 조사해 보니, 누암리 고분군의 무덤들은 돌로 방을 만들고 뚜껑을 덮은 돌방무덤의 형태다. 이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은 신라 진흥왕 시대의 금 귀걸이, 신라 토기 등을 비롯한 113점의 귀중품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런 귀한 보물을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무덤의 주인은 신라 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무덤군에서 가장 대표가 되는 1호 고분에는 천장에 지름 2m정도의 도굴 구멍이 있어 도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무덤은 높이 6m, 둘레 60m인 돌방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안은 큰 돌을 길게 쪼개 쌓았고, 천장은 긴 돌을 아치형(돔)으로 만든 후 뚜껑을 덮은 형태다.

무덤의 규모로 볼 때 이 무덤의 주인은 이곳으로 이주한 가장 유력한 신라 귀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이 대체로 6세기 중반 이후 중요한 지방도시인 중원경으로 자리잡음으로써 지배층이 경주에서 이주해 오고 그들이 지역의 중심 지배자로 토착화하면서 이런 대규모의 고분군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이 고분군은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이르는 신라 진흥왕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 TIP. 고분이란

국가의 성립시기부터 통일신라 때까지 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일반 백성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만든 무덤인데 대부분 삼국시대의 것들이다. 고분의 발생 시기는 고대국가마다 다르나 고구려는 서기 전 1세기, 백제는 3세기 초, 신라와 가야에서는 3세기 중엽이라고 한다. 각 나라들은 본래 있었던 무덤 형태에 주변 지역의 무덤 형식을 종합해 각기 특색이 있는 보다 나은 고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면 고분은 왜 발굴할까 글로 쓰여진 역사자료도 있지만 고분 연구를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신앙, 풍습과 제도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장신구·무기·그릇 등 각종 껴묻거리를 풍부하게 매장하였기 때문에 그 시대의 문화·미술·공예 수준과 내용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고분은 기록에 나타나는 옛사람들의 생활과 풍속을 실제로 보여주거나 보충 설명해 줄 뿐 아니라, 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시기의 문화와 생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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