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보다 200년 앞선 세종때 측우기
서양보다 200년 앞선 세종때 측우기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08 22: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희훈의 날씨에세이
이 희 훈 <대전지방기상청장>

다가오는 10월 9일은 562돌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을 기념해 제정된 기념일이다. 훈민정음, 즉, 한글은 우리나라 고유의 과학적인 문자로 세종대왕께서 이루신 여러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다.

세종대왕은 한글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여러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를 많이 발전시켜 강수량 측정기인 측우기,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을 제작하고 활용했다. 이 중 측우기의 발명으로 이어진 강수량의 측정은 1442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1639년 이탈리아의 카스텔리(B. Casteli)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당시 측우기는 주철이나 청동의 원통형으로 깊이 1자[尺]5치[寸](약 30cm), 지름 7치[寸](약 14cm)로 제작됐고, 비가 왔을 때 주철로 만든 자를 이용해 측우기 안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푼[分](약 2mm)단위까지 측정했다. 이것을 서울에서는 서운관에, 지방에서는 각 도의 감영에 두었고, 군 이하의 관청에서는 자기 또는 도기로 만들어진 측우기와 나무자 또는 대나무자를 이용해 빗물을 측정했다.

이렇게 시작된 측우기를 이용한 강수량 측정은 1586년(선조 19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중단됐다가 영조시대(1770년)에 세종의 옛 제도를 복구해 다시 시작됐다. 이때부터 관측하기 시작한 서울의 우량은 6.25전쟁 때 잠시 결측 됐지만 현재까지 계속돼 한 장소의 연속 관측값으로는 세계최장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후 측우기는 1910년경 경복궁의 관상감과 함흥, 대구, 공주의 감영 등에 4기가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나, 지금은 1837년(현종 3년) 공주감영에서 제작된 측우기만 남아있고, 현재 보물 561호로 지정돼 기상청(서울)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글창제와 같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기상과학 분야에도 이어지면서 측우기와 같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발명품을 만들게 했다. 한글날을 맞이해 세종대왕을 기리는 기상인으로서 다시 한 번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