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피렌체의 역사
<148>피렌체의 역사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07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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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1000년 역사 발자취 따라 르네상스 '문화의 꽃' 활짝

로마제국 집정관, 퇴역군인 위해 도시건설

거장들의 숨결 간직한 '지붕 없는 박물관'


피렌체는 고대 아테네와 예루살렘처럼 세계 문명 속에 르네상스를 잉태한 곳으로 작은 언덕들과 아름다운 경관이 조화를 이룬 도시다.

천여년 간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시민 민주주의에서 공화제 도시국가까지 다양한 정치적 연대 형태를 태동케 한 도시이다.

피렌체의 기원은 에트르스크인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며 기원전 59년을 전후로 했던 사월의 축제인 피렌체라는 도시 이름과 같은 의미인 '플로라리아'라는 꽃의 향연에서 유래한다.

당시 고대 로마제국 집정관이 수하의 퇴역 군인들을 위해 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예술과 관광 중심지로 꽃을 피우나 그 당시에는 부와 힘으로 로마와는 대조를 이루던 도시였다.

피렌체는 1000년 대 초기 자치 도시국가의 기초를 세우며 영토 확장을 시작하고 상업 활동이 번창하게 된다.

13세기 초 교황파와 황제파의 싸움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1300년 대 무젤로 출신 메디치가문은 상업과 금융업을 통해 엄청난 행운을 얻어 경제적으로 부강해진다. 죠반니 비치에 이르러 군주의 특권을 앞세우며 친족을 피렌체 정계에 등장시켜 가문의 권력을 정착시킨다. 코시모 일 베끼오에 이은 후계자 로렌죠 일 마니피코는 예술보호정책으로 피렌체를 예술의 도시로 절정을 이루게 한다.

그의 현명한 외교정치는 피렌체를 이탈리아 중심부로 부상시켰다. 피렌체는 메디치가의 지원을 얻어 1500년 대 중반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메디치가의 후계자들은 코시모 1세, 페르디난도 1. 2세, 코시모 3세 그리고 쟌가스토네 이후 후계자를 얻지 못해 1737년 외국 왕가로 이양하게 된다.

1865년 국민투표로 이탈리아는 통일을 이루며 피렌체는 5년간 이탈리아의 수도로 자리 잡게 된다.

새로운 세기 초기 30년간의 피렌체는 이탈리아 지성인들의 전당으로서 언어와 출판문화를 활성화 시켰다.

문인들과 시인들은 '레 쥬베 로제' 찻집에 모여 그들의 문학을 이야기 했으며 이런 것들은 토스카나의 문학을 정착시키고 유럽의 새로운 흐름을 열게 했다. 피렌체는 그리 넓지 않으므로 중요한 볼거리는 하루면 어느 정도 둘러 볼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들이 남긴 회화나 조각, 건축들에 대해 자세히 음미하고 싶으면 몇 칠 더 걸려야 한다.

이탈리아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며 르네상스 문화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 인류문화의 황금기 이끈 메디치 가문

예술가들이 르네상스의 도래와 더불어 길드의 장인 영역에서 탈피하여 독립적인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중세에서 14세기까지 예술가들의 작업환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전 유럽에 걸쳐 예술가들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직업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마을에서 살았다. 이러한 길드 또는 조합원의 기원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안전과 보호에 대한 인간의 기본 욕구를 통해 자라났다는 점이다. 그들은 막강한 힘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했으며 조합원들만 고용하는 사업장인 길드를 만들었다.

이슬람문화 유입… 폐쇄적 길드문화 변모

길드는 상품의 가격도 정하고 경쟁도 엄격히 금지하였다. 어느 조합원이 다른 장인보다 월등히 잘 만든다고 해도 남보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서는 안 되었다. 화가든 조각가든 이제 예술가는 양모 기술자나 금속 세공인이나 가구 제조업자와 꼭 같은 장인이었다. 상품 또한 제작물의 질에 대한 표준항목이 세세히 작성되어 있어 만들어진 제품은 엄격히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길드의 구성원들은 부유해지는 일이 용납되지 않았다. 한 장인이 대단히 부유하려면 반드시 다른 구성원들과 경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고 당연한 결과로 집단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마스터 자리에 오를 때에도 이런 구속은 여전했다.

그러나 이런 유럽의 관습과 풍습에도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현세의 고난 속에서 아름다운 내세를 기다리던 기독교 교리 속에 살던 사람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 현세의 호화로운 궁전에서 화려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이슬람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 기간 중 선진 이슬람문명과 동방의 화려하고 사치한 값진 향로와 물건들을 접하면서 이국적인 물건들을 사고 싶어 하게 되었다.

폐쇄적인 길드는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교회는 고리대금업을 금지했지만 외국과의 교역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 유럽에서 상인들이 모여들어 베네치아에서 수입해 들여온 동방의 풍부한 물품들을 사고팔았다. 길드 조직은 어쩔 수 없이 외국무역이라는 새로운 시장 형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유럽의 상인들은 엄청난 양의 화폐를 짊어지고 다니는 대신 종이 한 장으로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신용장을 고안해냈다.

그로인해 이탈리아 상인들은 유럽 금융업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군주들도 부유한 상인들에게 돈을 빌릴 만큼 엄청난 부를 축적한 상인세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주도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은 환전사업으로 막강한 부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림은 15세기 화가 마르코 델 아보가드로의 작품으로, 은행가들의 환전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고리대금업 통해 권력 축적… 예술 지원

그중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코지모 데 메디치(1389-1464)이다.

피렌체의 영주 역시 돈의 위력을 잘 알기에 메디치의 영향력이 자꾸만 커져가는 것이 두려워 메디치를 도시에서 추방했다.

메디치는 베네치아로 가서 왕처럼 살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전쟁자금도 대 주었다. 사실상 메디치 가문은 권세가들에게 버금가는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지모는 고리대금업자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대대로 내려오는 토지 귀족의 신분과 작위라고 하는 것으로 자신을 치장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그는 예술에 약간의 취미가 있었고 이를 통해 후일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무소불위의 메디치 가문을 이루는 시발이 되었다.

조반니가 가계를 일으켰고 코지모는 조반니의 아들이며 코지모의 손자인 로렌초가 바로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위대한 정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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