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마쿠사 고레지오 박물관
7. 아마쿠사 고레지오 박물관
  • 한인섭 기자
  • 승인 2008.10.06 2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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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임진왜란은 활자전쟁이었나
고레지오 박물관 관계자가 구텐베르크 인쇄기 사용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 도입… 400년전 성서 찍어

일본 기독교인·선교사 종교탄압 피해 서적 인쇄
1591∼1596년 사이 출판한 성서 등 29종 전시


구마모토현(熊本縣) 시마바라 반도 아마쿠사(天草) 시립 고레지오 박물관은 일본이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도입해 금속활자를 인쇄한 역사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중국, 한국이 일본 인쇄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지만, 일본은 이와 별도로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도입해 한때 가톨릭 성서 등 서적을 출판했다.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에 설치됐던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종교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점 선교사들과 함께 추방됐다. 하지만 일본은 400여년 전 도입한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인쇄출판 강국으로 성장한 밑거름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아마쿠사 고레지오 박물관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벽지 면소재지라 할 수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 건립돼 있다. 도청 소재지 격인 구마모토 역에서 버스로 2시간 30분, 택시로 30분을 합해 꼬박 3시간이 걸린다.

건평 600㎡(200평)가량의 2층 건물 규모의 아담한 박물관에는 구텐베르크 인쇄기와 당시 출판됐던 성서가 주요 전시물이다. '크리스트'의 일본식 발음인 '기리스탄'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특히 1591년부터 1596년 사이 7년 동안 아마쿠사에서 일본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이 종교탄압을 피해 전전하며 출판한 성서 등 29종의 서적이 전시돼 있다. 처음 인쇄를 시작한 시점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확인하기 어렵지만, 아마쿠사로 이동하기 전에도 상당한 물량의 인쇄를 했었다는 게 정설이다. 일본은 이 인쇄기를 금속활자 역사와 함께 가톨릭 탄압의 상징물로 여긴다.

구텐베르크 인쇄기 도입 시점을 전후해 오사카, 혼슈 등 일본 서부지역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기독교 선교 활동이 활발했다.

이 무렵 가톨릭 신자들은 선교사 양성을 위해 로마교황청에 소년사절단 4명을 파견했다. 이들은 1582년부터 1590년까지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귀국하면서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들여 왔다.

아마쿠사에서 성서 인쇄가 이뤄졌던 것은 이곳에 신학대학(신학원)이 설치됐기 때문이다. 아마쿠사에 신도들이 몰렸던 것은 바쿠후(幕府)의 탄압을 피해 숨어 종교활동을 하기 적절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아마쿠사는 시모 섬, 가미 섬 등 본 섬과 크고 작은 120개의 섬으로 구성돼 있는 지리적 여건이 이를 잘 말해준다.

아마쿠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서남부 지역 가톨릭 신자들은 당시 선교사 양성을 위한 소년사절단 로마 파견과 함께 신학대학을 설립할 정도의 교세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자들은 이때 포르투갈식 로마자로 성서를 찍었다. 일본은 이를 '天草本'이라 한다. 이때 출판된 서적은 현재까지 12종류가 남아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당시에는 서적 종류별로 300부∼500부씩을 찍는 게 일반적이었고, 최고 1500부까지 찍었다는 기록이 있다.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시 하포정에 위치한 아마쿠사 고레지오박물관 전경.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성서 외에도 서양 선교사들이 일본 풍속과 언어를 교육할 교재 출판용으로도 활용됐다. 1593년 이곳에서는 고대 그리스 우화집 '이솝 이야기'가 출판되기도 했다.

인쇄기를 들여온 소년사절단이 로마로 향할 무렵에는 종교탄압이 없었지만, 떠난 지 4개월 만에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가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종교탄압을 시작하면서 일본 내부 사정이 달라졌다. 이들이 신부 서품을 받고 인쇄기를 갖고 귀국했을 때는 이미 종교탄압이 진행됐던 시점이었다.

이런 사정을 반영하듯 소년사절단으로 파견됐다 귀국한 1명은 1614년 마카오로 추방된다. 1명은 1601년 병사했고, 나머지 1명은 결국 1606년 예수회를 탈퇴하는 배교행위까지 하게 된다. 마지막 1명이 남아 끝까지 선교활동을 하다 1633년 나가사키에서 결국 순교한다. 이 무렵 선교사 추방과 함께 인쇄기도 추방됐다.

하지만 7년 동안 서적과 서양식 사고방식이 퍼진 영향인지 1637년∼1638년 이 지역에서는 가톨릭 신자를 중심으로 한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난다. 1613년 금교령이 내려진 후 신도 탄압과 박해가 극에 달했고, 시마바라성 축성으로 인한 가혹한 노역과 무거운 세금은 결국 반란을 불렀다.

가톨릭 신도를 중심으로 아마쿠사 시마바라 농민군 3만7000여명이 봉기해 바쿠후 군과 3개월간 결전을 치렀다. 난은 결국 농민군 3만여명과 바쿠후 군 1만여명이 목숨을 잃는 일본 역사상 가장 비참한 사건으로 번진다. 난이 평정된 이후에도 가담했던 이들은 모두 처형됐다고 한다.

에도시대 도쿠가와 정권은 아마쿠사에 강제이민령을 내려 외지인들을 살게 하고, 곳곳에 절을 지어 가톨릭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이같은 영향이 작용한 탓인지 아마쿠사 고레죠 박물관은 일본 금속활자 인쇄의 또 다른 발원지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소박했다.

◈ 아마쿠사는 금속활자의 발원지

인터뷰 / 마루야마 스나오(丸山淳) 고레지오박물관 주간

도요토미 탄압피해 42행 성서 출판… 현재 일부만 남아

丸山淳(마루야마 스나오) 고레지오 박물관 주간(主幹·사진)은 "아마쿠사는 구텐베르크식 인쇄기를 활용해 일본에서 금속활자 출판을 처음 한 '발원지'"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얼마전 사회과 교사들이 다녀가는 등 한국 관광객들도 관심을 갖고 더러 찾는다"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아마쿠사시 교육위원회 문화과 직원이면서 박물관 운영을 맡고 있는 그는 "아마쿠사에서 출판했던 '42행 성서'가 모두 남아 있으면 엄청난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라며 "당시 발행한 29종의 서적 가운데 일부만 남아 있는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스나오 주간은 "지난 89년 시의회에서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다시 복원하자는 의견이 나와 독일 마인츠 구텐베르크 박물관에 있는 것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만든 것"이라며 "인쇄기 복원품을 받은 시점에 맞춰 지난 90년 5월 개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7년∼8년가량 사용하다 선교사들과 함께 추방됐지만 금속활자 인쇄를 처음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해 박물관을 건립했다"며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탄압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한곳에서 인쇄를 하진 않았고, 정확한 기록이 없어 처음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파견됐던 소년사절단이 나가사키로 들어왔기 때문에 시마바라 반도 가츠사에서 처음 출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1591년 무렵 이들이 아마쿠사로 도망와 다시 7년 정도 성서를 출판했다"고 설명했다.

스나오 주간은 이어 "인쇄기와 서적 외에도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하프와 피리 등 악기, 의상, 선박 모형, 천문관측에 사용했던 측천의(測天儀) 등 당시 상황을 엿볼 수있는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고 말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로 찍어 보급했던 성서(왼쪽)와 성서를 찍기 위해 만든 구텐베르크식 동판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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