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AD
THE ROAD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1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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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문학 칼럼
박 홍 규 <교사>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소설의 배경은 온통 잿빛이다. 색(色)이 사라진 세계. 도시와 거리 그리고 사람들의 집, 숲, 나무, 들판, 강 모두 회색의 재를 날리는 공간이다. 회색의 재가 쌓여있는 길, 회색의 잿가루가 풀풀 날리는 길, 어디를 둘러보든 모든 것은 불에 타 죽어 있다. 풀 한 포기 살아남지 않았다. 하늘은 흐리고, 줄곧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린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미 죽어버린 세상이 소설이 설정해 놓은 기본 배경이다. 끔찍하다. 소설 읽기가 고통이 되고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두 사람, 쇼핑용 카트에 식량으로 먹을 이런저런 통조림을 싣고 걷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알 수도 없다. 도시에서 왔으리라는 짐작만 가능하다. 그들은 겨울을 피해 남쪽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남쪽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남쪽은 목적지가 아니다. 방향일 뿐이다. 남쪽으로 가는 길의 풍경은 하루를 걷든, 열흘을 걷든 달라지지 않는다. 회색의 세계, 계속 회색빛만 고장 난 영사기에서 나오는 세로 줄 그어진 흑백 영상처럼 반복되고 있다.

그런 길을 두 사람은 가고 있다. 가지 않을 수도 없다. 세상은 먹을 것조차 모두 사라져, 쇼핑용 카트에 실린 통조림이 바닥나기 전에 무엇이든 구해 먹어야 한다. 그들처럼 아직 살아남아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누군가에게 약탈당해 어디든 남아있는 음식은 없다. 그러니 한곳에 머무는 일은 곧 죽음이다. 음식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움직여야 한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나' 아닌 '상대방'은 나의 것을 빼앗는 약탈자이거나 '내'가 약탈을 해야 하는 대상이다. 카니발리즘은 흔하다. 상대방의 음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길을 가야 한다. 혹여 먼 거리에서라도 사람의 기척이 있으면 짐을 감추고 숨어야 한다. 서로 두려워 피하거나, 식량으로 쓰기 위해 포획하거나 포획당한다. 그렇게 움직여 가는 쪽이 남쪽이다.

그러나 남쪽은 희망이 될 수 없는 희망이다. 아직 가 보지 않았을 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았을 뿐, 색(色)이 사라진 자리에 회색의 재만 날리는, 남쪽이 지금 걷는 곳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은 뻔히 드러나 있다. 알면서도 놓을 수 없어 매달리는 가망없는 지푸라기 같은 희망. 살아 숨을 쉬면서 잿빛의 길을 가야하는 고통 속에서 소설 속 인물은 죽어버린 자들을 부러워한다. 그러면서도 혹시 남아 있을 곡식 낱알을 찾으며, 찾으러 헤매며 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희망. 아니 희망이라기보다 살아있음에서 오는 단순한 관성, 살아 있으니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길을 걷는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이런 의문은 어리석다. 무슨 일이 벌어졌든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믿는 두 사람에게는 과거에 벌어진 '어떤' 일은 아무 상관이 없다. 계속 음식을 찾아내며 끊임없이 길을 가는 일이, 남쪽으로 가는 일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장면을, 그 이야기를 혹시 있을 수 있는 미래의 어느 비극과 연관지을 것도 없다. 미래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 삶의 비의(秘意)는 소설이 설정해 놓은 배경이나, 인물들이 길을 걷고 있는 모습과 아예 다른 것이 아니다. 차라리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읽은 일 자체마저 잊어버리는 시간보내기용 여섯 권짜리 무협소설이라면 생각은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고통이다. 작가의 충격적 상상력 때문만이 아니다. 한풀이 하듯 망나니같이 권력을 휘두르는, 그럼으로써 갈수록 잿빛이 되어가는 삶의 현실이, 관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모습이, 희망이 아닌 거짓 희망에 휩싸여 회색의 재가 날리는 길을 걸어야 하는 삶의 양상이 자꾸 겹쳐지기 때문이다.

[ 읽은 책 : THE ROAD(로드). 코맥 맥카시, 정명목 옮김. 문학동네.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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