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다리에서 쓴 편지
방아다리에서 쓴 편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04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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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교의 방아다리에서 쓴 편지
김 익 교 <전 언론인>

여름을 노래하던 우렁찼던 매미소리가 점점 약해집니다. 일에 치여 피곤한 농심을 달래주던 그 시원한 소리가 이제는 애처롭게 들립니다. 하기사 여름내내 울었으니 힘이 들만도 하지요.

비 때문에 한 이틀 뜸했던 예초기 소리가 다시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농촌에서는 이맘 때 벌초가 큰 행사지요. 요즘 이웃들도 만나면 "벌초 했느냐"로 첫마디가 시작됩니다. 추석 제사에 앞서 가까이 있는 친척들이 날 잡아 모여 풀도 깎고 주변 정리도 하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객지에서 못 오시는 분들은 '벌초대행'을 통해서라도 산소에 벌초만큼은 꼭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알게 모르게 우리의 바탕에 깔린 조상님 공경하는 미풍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김장배추도 다 심었고 엊그제 씨를 뿌린 것 같은 무가 이번 비에 한뼘이 넘게 자랐습니다. 일찍 심은 방콩은 베기 시작하고 참깨는 벌써 털어 마무리가 됐습니다. 벼이삭이 하루가 다르게 고개를 숙여가고 풀섶에 가렸던 호박이 누르스름해지며 존재를 알립니다. 따가운 가을햇볕이 오곡백과를 살찌우고 고추, 콩 등 농작물들을 잘 마르게 합니다. 콩 털고, 들깨 털고, 벼 베면 올농사 끝입니다. 날씨가 요즘만 같으면 대풍이지요.

오늘 아침나절 평소 친절하게 지내는 이웃분을 만났습니다. 이제 일흔을 바라보시는 이분은 평생을 농사로 보내시면서 마을 이장까지 보셨고 동네 대소사에 칼칼하시기로 정평이 나신 동네 원로중에 한 분이십니다. 언제나 봐도 일을 잡고 계시더니 오늘도 일찍 벤 방콩을 정리하시느라 바쁘게 손을 놀리시면서도 여전히 반갑게 대해 주셨지요.

모처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농사 이야기가 나오자 "이제는 정말 힘이 들어 농사 못짓겄어. 이건 힘만 들고 몸만 상하지…" "차라리 농촌은 사람 많고 정 많았던 옛날이 더 좋았던 것 같어. 사람대신 기계가 한다고 하지만 기계값 빼고 나면 뭐 남는게 있어야지…." 아직 건강하니까 있는 땅 놀릴 수는 없고 그저 식량거리나 한다고 마지못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우리 젊어서는 쌀 한말 내면 쓸만 했는데 지금은 쓰고 자시고 할게 있어야지." 맞습니다. 작금에 우리 농촌의 실상을 함축한 말씀입니다. 그나마 농촌이 지탱하는 것은 이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슬이 흠뻑 내리는 밤입니다. 찬이슬이 싫은지 풀벌레의 톤이 높아지네요. 사방가득한 이 소리를 빽코러스로 귀뚜라미의 독주가 새벽까지 계속됩니다. 예년보다 빠른 추석이 추적추적 다가오고 있습니다.

연밭에 연꽃이 지면서 가느다란 줄기에 벌집 같은 연방이 도토리 같은 연실(연밥)을 가득 담고 흔들거립니다. 그 아래 지난주에 시험 방사된 금개구리가 연잎을 집 삼아 새 터전을 마련하고…. 연꽃마을의 가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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