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본 동활자 주조한 도쿠가와 이에야쓰
<3> 일본 동활자 주조한 도쿠가와 이에야쓰
  • 한인섭 기자
  • 승인 2008.09.01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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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임진왜란은 활자전쟁이었나
일본 동경 돗반박물관 관계자가 에도시대 탄생한 목판 풍속화 등 인쇄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금속활자 시대 개막… '活字人間' 추앙

1603년 동활자 주조… 2, 3차 日 최초 금속활자 '스루가 활자'
약탈 서적으로 文庫 설치… 불경 보급·문화 예술 전반 영향
인쇄술 발달, 유교사상 자리매김·우키요에 등 예술 전성기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1543∼1616년)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활자와 인쇄기, 인쇄공, 서적 등 전적 유물을 고스란히 손에 넣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활자를 천황에 바치는 역할을 했지만, 도쿠가와는 동활자 주조에 성공해 목판활자에 머물렀던 일본의 인쇄문화 부흥기를 연다.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7년(선조 30년) 8월 도요토미가 죽자 가신이자 정적 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권력투쟁 끝에 권력을 거머쥔다.

도쿠가와는 1603년 일본 황실로부터 쇼균(將軍) 지위를 받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시대를 연다.

에도(현 도쿄)시대(江戶時代)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1603년부터 15대 쇼군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황실에 반환한 1867년까지 이어진다. 장기간 치러진 내전과 명나라까지 개입했던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나 도쿠가와의 시대는 평화를 구가한 시기였다.

특히 일본은 이 기간동안 조선에서 약탈한 불경과 성리학 서적, 금속활자를 기반으로 각종 서적 출판이 활발해져 문화, 예술의 전성기를 맞는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쇼균 지위를 얻은 1603년 처음으로 동활자를 주조해 후양성천황(後陽成天皇)에게 바친다. 도쿠가와의 제1차 동활자주조이다. 그는 이어 1615년, 1616년 성리학 서적 군서치요(群書治要·중국 당나라 정관(貞觀) 5년(631)에 태종의 명으로 위징(魏徵) 등이 엮은 책. 위정자가 수양을 쌓는 데 참고가 될 만한 글들을 발췌했다)와 대장일람(大藏一覽·명나라 때 진실(陳實)이 편찬한 불경.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말에 들어와 조선초 발간됐다)을 동활자로 찍는다.

일본은 도쿠가와가 이때 만든 2, 3차 동활자를 최초 금속활자 스루가 활자(駿河版)라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스루가 동활자와 출판된 군서치요가 돗반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도쿠가와는 1,2,3차 동활자 주조를 시작으로 각종 서적 출판 등 문화진흥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 금속활자 시대를 연 그가 오늘날 '활자인간(活字人間)'으로 칭송 받은 이유가 됐다.

도요토미가 오늘날 활자인간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패권을 거머쥐면서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참전 장수들이 약탈한 조선활자와 서적 등 귀중한 유물을 손에 넣은 덕분이었다.

도요토미는 약탈 활자와 서적으로 후지미테이문고(富士見亭文庫)와 스루가문고(駿河文庫)를 설치했다.

도요토미가 설치한 문고를 비롯해 임진왜란 참전 장수들의 학승과 후손들이 만든 문고는 성리학과 주자학, 불경 보급은 물론 문화, 예술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정치이념 형성과 윤리, 철학 체계가 형성됐다. 임진왜란 전 일본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상은 불교였으나, 유학이 새로운 사회이념으로 등장했다.

에도시대 이전과 달리 도쿠가와 시대는 유교사상이 자리를 잡았고, 문인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생활 속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인쇄문화가 발전과 동시에 서적이 급속도로 보급된 영향이었다.

조정의 하쿠시가(博士家)에서 세습적으로 한당학(漢唐學)을 가르치거나, 선승들이 불교를 보충하려는 목적으로 연구하는 등 일부계층이 독점했던 유학이 대중적인 학문으로 전환됐다.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7년 9월 전남 영광에서 왜군에게 포로로 잡힌 강항(姜沆)은 일본의 주자학을 진일보시켰다. 퇴계학파였던 강항은 형조좌랑으로 군량 공급을 하다 포로가 됐다.

그는 일본에서 에도유학의 창시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와 만나 많은 영향을 준다.

승려였던 그는 강항으로부터 주자학과 예법을 전수 받은 후 불교와 결별하고, 유학자로 자립한다. 도요토미의 임진왜란에 반대하기도 했고, 유교연구를 위해 중국이나 조선 유학 기회를 노리던 그는 강항을 만난 후 에도유학을 개척했다. 이 중 하나가 일본 최초의 사서오경 주석본 '사서오경왜훈(四書五經倭訓)'을 완성한 것이다. 이 책이 간행되면서 왕실 중심의 유학이 개방되면서 일본 사회에 유학사상이 뿌리를 내렸다. 일본 유학에 이같은 영향을 준 강항은 2년 8개월만인 1600년 5월 귀국했다. 그는 스스로 죄를 자처하며'간양록(看羊錄)'을 남겼다.

에도시대 서적 출판이 활발해지면 학술분야 외에 대중문화도 한층 발전했다.

이 중 하나가 서민생활과 밀착한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繪)였다. 이는 채색 목판화로 대부분 풍속화이다. 전국시대를 지나 평화가 정착되면서 신흥세력인 무사, 벼락부자, 상인 등을 배경으로 한 사회풍속, 인간 묘사 등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들이 쏟아졌다. 인쇄술 발달에 힘 입어 정교한 채색 목판화가 주류를 이뤘고, 생활주변을 소재로 한 풍속화 외에도 남성들을 유혹하는 유곽의 게이샤도 작품 소재로 등장했다. 가부키 등을 공연했던 극장가 주인공들, 연예인이라 할 수 있는 야쿠샤(배우)도 등장했다.

이 시기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우타마로(喜多川歌磨), 우타가와 도요하르 (歌川豊春) 등 많은 천재화가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일본의 문화의 뿌리를 형성한 인쇄술과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던 유교 역시 약탈활자와 서적, 포로들의 영향이 가장 컸던 것이다.

이즈미 무네무라 돗반박물관 학예기획실장(宗村泉·일본 도쿄)은 "도쿠가와 이에야쓰 시절에는 쇄국정책을 썼지만, 전쟁이 없었던 시기여서 문화, 인쇄 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다"며 "인쇄술 영향으로 그림, 판화까지 발달했다"고 설명했다. 이즈미 실장은 이어 "이 시기 히라가나, 가타카나 보급으로 문맹률도 낮아졌다"고 말했다.

◈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日 마지막 막부 에도시대 열어


무사가문에서 태어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일본의 마지막 막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1603∼1867년)의 창시자이다.

1592년∼1598년 사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강행했을 때는 치안을 이유로 일체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후계자 도쿠가와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패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놓인다. 1600년 10월 도쿠가와를 지지했던 동군은 미쓰나리를 지지했던 서군을 제압해 권력을 손에 넣는다.

종소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 끊임없는 지속되는 내전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59세였던 1603년 천하통일과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는 쇼균에 오른지 2년만에 권력을 장남 히데타다에게 물려주는 방식으로 장기집권을 꾀했다.

임진왜란 이후 천하통일에 성공한 도쿠가와는 가장 먼저 유교를 도입해 새로운 국정철학으로 선포한다. 그는 일본을 무인 통치에서 문인의 통치시대로 만들었고 새로운 관료체제를 정립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계기로 조선의 관료체제를 본떠 중앙집권제를 갖추기도 했다. 그는 영주들의 정치적 권력을 축소하긴 했지만, 관료들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지 않고 서로다른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의 분할통치를 도입했다.

1616년 천황으로부터 다이죠 다이진에 임명된 도쿠가와는 같은해 4월 고향 슨푸에서 73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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