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초기 근대식 건물 양관
청주의 초기 근대식 건물 양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8.28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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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체험 문화답사기
한 윤 경 <역사논술 지도교사>

우리의 전통가옥인 초가집과 기와집은 자연과 잘 어울리는 빼어난 곡선미를 갖고 있지요. 백여 년 전 서양의 물결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현대식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우리의 전통가옥은 하나, 둘씩 사라져 버렸지요.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초가집이나 기와집이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근대식 서양건물이 처음 들어왔을 당시에는 큰 구경거리였다고 해요.

탑동에 있는 일신 여중·고는 1960년대에 세워진 기독교 학교로 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요. 교정 안에는 유형문화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백년을 훌쩍 넘어버린 서양식 건물의 양관 건물 4채가 남아 있고, 학교 밖에 2채의 건물이 더 있어요.

구한말 개방과 함께 우리고장에도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회를 세우며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하는데요. 외국인 선교사들은 거주와 선교의 목적으로 교육과 진료를 할 수 있는 건물을 지었어요. 양관도 같은 목적으로 지어져 사용했고, 학교를 세울 당시 교실이 부족했을 때는 교실로 쓰기도 했지요. 지금도 미술관이나 행정업무를 보는 곳으로 사용을 하고 있구요.

이 건물들은 지난 1904년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해서 1906년에 제3,4호가 지어졌고, 1910년에서 1912년에 제1, 5, 6호가 그리고 제2호 등 총 여섯채의 건물이 지어졌어요.

양관은 건립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당시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두 채는 이곳에서 질 좋은 점토가 발견돼 그 점토로 벽돌을 구워 사용했다고 하고요, 기단부의 돌은 청주읍 교회 터에 있는 옛 관사와 감옥을 헐어 사용했다고 해요.

다른 자재들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 수입을 해서 사용했지요. 예를 들면 유리를 비롯해 스팀 보일러, 벽난로, 수세식 변기와 각종 창호 철물류들 같은 것은요.

흙과 나무로만 집을 짓던 당시에 처음 보는 자재들로 짓는 서양식 건물인 양관이 큰 구경거리가 되었지요. 동네 사람들은 양관 건물이 한 채씩 늘어날 때마다 일일이 지켜보며 신기해 하기만 했대요.

갈수록 선교사들이 늘어나자 그들이 거주할 건물과 소민병원, 성경학원 등을 위해 1932년까지 계속 건물을 새로 지었으니, 당시에는 오랫동안 큰 볼거리가 된 것이지요. 새로운 건물들은 신기했지만, 아직 낯선 모습의 선교사들은 반갑지 않았지요. 그러다 제 6호인 소민병원이 완성될 즘에 청주에 큰 홍수가 났어요. 무심천이 넘쳐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지요. 이때 선교사들이 구호활동을 하여 많은 도움을 주게 되자,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요. 차츰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정착하게 되고 널리 퍼지게 되었어요.

양관건물은 그 건립시기에 따라 다른 건축 양식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 지은 것은 한옥형태에 서양식 건축양식을 접목하다가 나중에는 2층, 3층 건물로 짓고 일부 지붕은 함석으로 하는 등 점점 서양 건축양식이 많이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것은 서양식 건물이 처음 들어오면서 어떤 변화를 갖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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