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칙과 소원칙
대원칙과 소원칙
  • 권혁두 기자
  • 승인 2008.06.30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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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권 혁 두 부국장 <영동>

며칠전 한 중앙 일간지가 1면에 큼지막한 사진을 실었다. 촛불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이 시위대에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다. 사진의 제목은 '짓밟히는 공권력'이다. 너댓명의 시위대에 둘러싸여 주먹과 발길질을 당하며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경찰의 모습은 제목을 압축한다. 당하는 경찰은 20대 초반의 전경으로 보였다. 그를 군대에 보낸 부모가 봤으면 억장이 무너질 장면이다. 사진이 실린 신문은 촛불집회에 대해 줄기차게 부정적 시각을 유지해온 대표적 보수언론이다. 그래서 특정 사진만을 부각시켜 시위의 폭력성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얼마전 전경의 군홧발에 머리를 짓밟히는 시위 여대생 동영상과 마찬가지로 이 사진 역시 '도대체 개인적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부딪혀 증오와 폭력을 교환하는 야만적 상황의 발원지는 어디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준다.

이날 사진과 함께 이 신문의 1면을 장식한 머릿기사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암시한다. 큼지막하게 뽑혀진 제목은 '청와대만 지키는 정권'이다. 기사는 '지금 이명박 정부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로 시작된다. 밤마다 서울 도심이 시위대에 의해 점거돼 무법천지가 되고 시민 불편과 불안은 극에 달하고 있지만 정부는 숨어서 눈치만 살피고 있다고 질타한다. 시위대가 경찰을 짓밟고 신문사를 공격하는 등 폭력으로 일관하는데 대통령과 경찰 총수는 말로만 '엄정 대처'를 외친다고 비난한다.

기사의 요체는 현행법에 따라 시위를 가차없이 진압하고 주동자는 잡아들여 거리의 평화를 찾으라는 채근이다. 불법시위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776억원에 달한다는 한 연구기관의 추산치까지 제시하며 공권력 발동만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정부를 재촉하고 있다. 기사는 말미에서 '참고있는 일반시민들도 과연 이 정부가 존재할 의미가 있는 것인지, 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단언한다.

강경진압이 유혈사태를 부를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정부에 공권력 동원을 압박하는 기사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들에 따라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기사의 몸통과 꼬리를 잘라내고 잔가지까지 털어내면 현 상황에 대한 보편적 진단이 나온다.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 이명박 정권'과 '정부가 왜 존재하는지 고민하는 시민'이다. 진정으로 '자책하고 뼈저리게 반성했다'면 대통령이 전면으로 나와 '누구를 위한 정부냐'고 묻고 있는 시민들의 의문을 풀어줘야 할 때라는 것이다.

전국책(戰國策)에 순자(荀子)가 초나라의 재상 춘신군(春申君)과 대화하며 군주의 덕목을 설파하는 대목이 나온다. 순자는 '군주는 바른 정치로 백성을 사랑하고 예를 숭상하고 선비를 공경하고 어진 이를 높이고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는 대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공자의 주장을 인용했다. 순자는 대원칙을 옳게 지키고 작은 원칙들도 어기지 않는 군주는 최고라고 평가했다. 대원칙은 지키나 작은 원칙은 무시하는 군주는 평범한 수준이라고 했고 대원칙은 지키지 않으면서 작은 원칙에는 매달리는 군주는 낙제점이라고 단정했다.

순자가 통치자에게 강조한 대원칙은 촛불시위에서 표출된 국민들의 욕구를 풀어주는 민본(民本)정치를 의미한다. 현행 집시법을 들이대며 시위를 강경진압하는 것은 대원칙보다 소원칙에 충실하겠다는 발상이다. 대통령이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빨리 시위대를 거리에서 몰아내라며 소원칙을 강조하는 언론에 따를지 순자의 대원칙론에 귀기울일지 지켜볼 일이다.

아 참, 순자는 이런 말도 했다.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엎기도 한다(君子舟也 庶人子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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