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일체유심조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3.04.0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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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동양 5천년의 지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교의 경전은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의 사서(四書)다. 사서 중 하나인 대학(大學)의 정심장에는 “심부재언(心不在焉) 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이불문(聽而不聞) 식이부지기미(食而不知其味)”라는 구절이 나온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잘 모른다는 의미의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모든 것들은 다 내 마음의 투영(投影)이고 투사(投射)'라는 말도 널리 쓰이고 있다.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 절을 한다.'는 속담 또한 우리 주변의 보이고 들리는 일들이 마음의 투영이고 투사란 사실을 잘 보여준다. 처가 집 말뚝이 절을 받을만한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화엄경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세상사 모든 일은 오직 마음의 지은 바'라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내 마음이 곧 눈앞에 실존하는 목전의 세상이고, 목전의 세상이 곧 내 마음의 발현이기 때문에 언제나 세상은 내 마음의 투영이고 투사로써, 마음과 세상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의 가르침이 일체유심조다. 오랜 세월 동안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일 경우에는 불원천리(不遠千里) 즉, 천 리 길도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사람이 집 앞까지 찾아 왔을 때는 지척천리(咫尺千里) 즉, 넘어지면 코가 닿을 지척의 거리도 멀게만 느껴진다. 마음에 따라 천 리 및 지척이란 물리적 거리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 리 및 지척의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마음의 작용에 따른 일체유심조임을 알 수 있다.

일체유심조와 관련,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있다. `배가 고파도 배가 부르다고 마음만 먹으면 배고픔이 해결된다는 망상을 피우면서 생각 놀음을 일삼는 짓을 일체유심조로 착각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배가 고파도 배가 부르다고 마음먹으면 배가 부르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체유심조가 아닌 망상일 뿐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잠을 자는 것이 순리다. 다만 지나친 식탐으로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일어났다면, 그 생각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것이 요긴하다. 참으로 배가 고픈데도 불구하고 배가 고프지 않다는 자기 최면을 통해 배고픔을 외면하려는 짓은 어리석고 헛된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일로 식사 시간을 놓쳤다면, 최대한 신속하게 밥을 챙겨 먹던가, 아니면 `밥도 못 먹고 고생만 한다'는 등등의 신세 한탄 등 온갖 부정적 생각을 쉬고 담담하게 처한 현실을 인정하며 받아들인 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배가 고프지 않다'는 얄팍한 자기 최면을 통해 현실을 외면하며 왜곡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배가 고픈데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생각으로 힘까지 빼는 어리석은 짓이다. 배가 부르다는 가기 최면은 좋게 봐줘도 일시적인 진통제 효과를 얻는 것이 전부다. 무엇이든지 긍정적으로 봐야 하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현실을 왜곡하며 자기 최면을 걸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한 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야 한다.

천 리 길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면, 굳이 멀다고 불평불만을 하거나 천 리 길도 가까운 거리라는 등의 자기 최면을 거는데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 없이, 매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가는 실존적인 삶을 영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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