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타인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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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2.14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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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이 수 한 <모충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필자가 속한 가톨릭교회(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 새로운 이름(본명 혹은 세례명, 서양에서는 first name이라 함)을 받는다.

아기가 태어나면 그 부모가 이름을 지어 불러주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기에 새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이다. 보통 생일과 가까운 날의 성인 축일을 잡아 이름을 정하기는 하지만 본받고 싶은 성인의 이름을 따서 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필자는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태어난 날과 가까운 축일의 성인 이름을 따서 시릴로(Cyrillus)란 이름을 받았다. 그런데 그 날이 공교롭게도 연인들이 초콜릿을 주고받는다는 밸런타인데이다. 즉 2월14일은 시릴로라는 성인의 축일인 동시에 발렌티노(Valentinus)라는 성인의 축일이다. 다시 말해 연인들이 주고받는 초콜릿이나 사랑고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받아야 할 성인의 축일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상인들의 상술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더구나 이와 관련해 생겨난 3월14일 화이트데이는 정말 정체불명의 기념일인 것이다.

어찌됐든 사람들은 이 날에 초콜릿이나 사탕을 주고받는다. 아마도 사랑을 초콜릿이나 사탕처럼 달콤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달콤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아니라 상대중심적인 사고를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자녀는 산고라는 고통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산고를 두려워하는 이는 결코 어버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부모의 자녀사랑은 달콤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산고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쓰디쓰다 해야 맞을 것이다. 그 쓰디 쓴 삶 가운데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부모의 자식 사랑이다.

남·녀 간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상대 중심적이 된다. 상대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결코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모든 것을 상대중심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자기희생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삶이 사랑의 삶이지만 이런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행복감을 느낀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삶은 사랑이 아니라 좋아함이다. 사람들은 꽃을 사랑한다 하지 않고 좋아한다 말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꽃을 꺾어 꽃병에 꽂아 즐기곤 한다. 다시 말해 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없다. 꽃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꽃의 관계는 상대중심적인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좋아함의 관계인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되 좋아하지 말고, 사물은 좋아하되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물질 만능주의인 현대 사회에서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물질을 얻기 위해 물불가리지 않는 모습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을 좋아하고 물질을 사랑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모습이 안타깝다. 인간 중심인 사랑함의 사회가 아닌 물질 중심의 좋아함의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물질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지 인간이 물질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 즉 물질중심의 성장이 아니라 인간중심의 분배가 현대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분배는 사라지고 성장만이 지상 과제인양 호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쓰디 쓴 사랑은 사라지고 달콤한 좋음만이 판치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1년 365일이 자기중심적인 좋아함의 나날이 아니라 상대중심적인 사랑의 나날이 되기를 바래본다. 물질중심의 성장만을 추구하지 말고 인간중심의 나눔을 염두에 두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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