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라 속에서의 영원 4
찰라 속에서의 영원 4
  • 반영호 시인
  • 승인 2021.11.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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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3년차. 서리태만 아직 남아 있고 올 가을걷이가 다 끝났다. 서리태는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린 후 느지막하게 수확하는 작물로 한겨울에 타작해도 괜찮다고 한다. 다른 콩들은 껍질이 터지기 때문에 시기를 잘 맞춰야지 자칫 늦어지면 낭패지만 껍질이 단단한 서리태는 그럴 걱정이 없다. 농부들이 다 그렇듯 이제 봄까지는 농한기로 마치 긴 방학이 돌아온 것 같다.

올 농사는 대풍이다. 특히 주작물인 땅콩 농사가 기대 이상으로 풍작을 이뤄 냈다. 작년에 800평을 심어서 17가마를 생산했는데 올해는 절반인 400평에서 25가마니를 캤으니 엄청난 쾌재다. 다만 작년에 비해 가마당 가격이 2만 원가량 떨어진 게 못내 아쉽다. 봄에는 땅콩을 심자마자 새들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얼마나 고달팠는지 지금도 새 소리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어느 스님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씀과는 달리 오래도록 새소리에 대한 트라우마는 쉬이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동쪽 창문이 벌써 밝았느냐 종달새가 우지지고 있다./ 소를 먹이는 아이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느냐/ 고개 너머에 있는 이랑이 긴 밭을 언제 갈려고 하느냐.//

약천(藥泉) 남구만이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며 쓴 작품이다. 밝아오는 아침과 하늘 높이 날며 지저귀는 종달새를 통해 보이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 나타나 있는 권농가(勸農歌) 중의 하나이다.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가르침과 부지런히 일하는 건강한 모습이 작품 전반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다른 해석으로는 `동창'을 동쪽에 뜨는 해, 즉 숙종 임금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노고지리'는 당시 조정대신, `우지진다'는 마치 새들이 짹짹거리며 야단스럽게 우는 듯한 중신들의 모습, `소'는 백성, `아이'는 목민관, `아니 일었느냐'는 난세에 복지부동하고 있는 관료들의 자세, `언제 갈려 하나니'는 경세치국(經世治國)에 대한 염려와 경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꼭두새벽에 일을 시작하면서 수없이 뇌까렸던 이 `동창'에 나오는 노고지리는 종달새지만 내게는 땅콩을 파먹던 산까치나 비둘기, 꿩 등 유해조류를 떠오르게 했다.

모든 밭작물이 대체적으로 대풍을 이뤘지만 수도작은 평년작이다. 800평에 경작한 벼농사는 전량 정부수매를 했고 텃논 200평에서 수확한 벼를 도정하여 식량으로 비축했다. 해마다 이맘때면 수매가를 두고 정부와 농민 간의 투쟁이 벌어졌었다. 농민들은 농협 앞에다 벼 가마니를 산처럼 쌓아놓고 트랙터며 농기계를 앞세워 시위를 벌였으나 올해는 아직까지 조용한 걸 보면 원만한 가격 조절이 된 것일까? 어쩌면 젊은이들이 없이 노인들만이 농사를 짓는 농가에서 시위할 힘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자가 농기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경작지가 넓은 대농이면 모르지만 보통 땅 몇 마지기로 벼농사를 지어서는 절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밭농사가 평년작이면 평당 1만 원 정도 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수도작은 5천 원을 밑돈다. 이게 순수익이면 감지덕지다. 트랙터 작업인 가을 추경부터 봄에 로터리치고 못자리에 모 기르기며 이앙기로 모내기, 콤바인 타작하기 등 모두 남의 기계를 빌려야 하는데 모두가 지출할 돈이다. 그뿐인가 제초제나 농약 값을 제하고 나면 남는 건 허탈감뿐이다.

“땀 흘린 보람도 없이 남는 건 빚과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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