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이 오고 있다
  • 최승옥 수필가
  • 승인 2019.08.2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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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승옥 수필가
최승옥 수필가

 

불볕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밭으로 향한다. 가뭄으로 모든 곡식이 힘들어 애타게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아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남편은 오늘도 들깨 모종을 할 참이다. 들깨 모종을 시작한 지도 여러 날이 되었다. 맨 먼저 심은 들깨 모는 이파리가 제법 나폴 거린다.

들깨밭을 바라보니 지난날 일이 떠오른다. 그해도 들깨밭을 붙이게 됐다. 도지를 얻은 것이 아니다. 남편의 본업은 굴착기 사장이다. 지지난해 밭에서 남편이 굴착기로 밭을 만들어 주는 일을 했었다. 그런데 밭주인은 돈이 없어서 품값을 못 준다고 했다. 그 대신 묵정밭을 빌려주겠으니 무엇이든 심어보라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밭에는 꽤 여러 작물이 심겨졌다. 몸에 좋다는 서리태, 고구마, 땅콩, 메주콩, 처음으로 심어보는 참깨까지 지금부터 가을까지 거둬들일 알곡이 많다.

그런데 밭에 한 번 오려면 힘이 든다. 나는 운전도 못 하는 데다 밭은 후미진 곳에 있어 차가 없으면 아예 드나들 수가 없다. 무엇보다 잡곡 농사는 처음이라 암담했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고민이 많았다. 땅을 놀리자니 굴착기 수고비를 받지 못한 것이 속상하고, 무엇을 심으려니 걱정이 됐다.

이 밭은 원래 묵정밭이었다. 몇 해 동안 손길이 닿지 않아 밭은 온통 잡초들로 광장을 이뤘고, 그도 모자라 웃자란 잡초들로 난장판이 돼 있었다. 남편은 굴착기로 물고를 내고 둑을 만들어 다듬어 주면 나는 호미로 긁고 또 긁어내어 밭을 파헤치다시피 했다. 열흘이 지나도록 풀을 뽑고 이랑을 타느라 밭에서 살았다. 그리곤 들깨 모종을 심고부터는 호수를 끌어 물을 주기 시작했다. 봄 가뭄에 배배 꼬이며 타들어 가는 모종을 살리려 물 주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가뭄에 착 구부러져 있는 들깨에 물을 주고 나면 꼿꼿하게 일어서는 모습에 허리 아픈 것도 잊었다.

남편은 밭둑에도 들깨 모를 심었다. 어디 밭둑뿐인가. 오밀조밀 구석진 빈 땅마다 죄다 심고 또 심는다. 인제 그만 좀 심자고, 그냥 되는 대로 하자는 내 말에는 마이동풍이다. 아예 대꾸도 하지 않는다. 속이 터지는 내 쪽에서 도대체 왜 이리 들깨만 심어 대느냐고 하니, 들깨는 까다롭지가 않고 심기만 하면 자기가 알아서 큰다고 했다. 그보다는 쑥쑥 자라는 모습이 신통하여 농사일이 힘들지 않다고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밭이 지저분하면 지나가는 이웃 농부가 밭주인이 게을러서 헛농사 짓는다고 할까 봐 기를 쓰는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복숭아 농사뿐만 아니라 전 품종의 농업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것만 같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다. 모든 작물은 주인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그만큼 관심과 사랑을 주면 작물도 본심을 알아본다는 것일 거다. 어느 과수원에 가보면 잔잔한 음악을 들려주는 곳도 있다. 어디 작물뿐이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도, 사람과 동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작물도 사랑과 정을 담아 건네주면 달콤하고 튼실한 결실을 보지 않던가.

우리 밭은 내 발소리보다 농업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남편의 발걸음 소리를 더 좋아할 것 같다. 참깨는 참깨대로 고구마는 고구마대로 땅콩 등이 참으로 실하다. 한 줄금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에서 가을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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