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시간
간절한 시간
  • 이명순 음성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한국어 강사
  • 승인 2019.04.2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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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명순 음성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한국어 강사
이명순 음성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한국어 강사

 

파키스탄 고향에 간 학생이 약속했던 날짜에 오지 않았다. 전 학기에도 3단계 공부를 하며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는 모범적인 학생이다. 올해 4단계를 이수해야 하는데 네 번 이상 결석하면 출석 80시간이 부족해 단계평가를 볼 수 없고 과정 이수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세 번은 결석을 해야 하지만 이후로는 꼭 출석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성실한 학생이라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파키스탄과 인도가 2월 말쯤 군사적으로 충돌했다고 한다. 영유권 분쟁지역에서 공중전이 벌어져 양국 간에 감정이 격해졌는데 파키스탄이 자국의 영공을 모두 폐쇄했다. 급작스레 공항이 폐쇄되니 일반 사람들이 불편을 겪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국가 간의 군사적 충돌만큼 긴박한 상황은 없다. 그런 상황 속에 대책도 없이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날이 지속되었다. 다행히 양국 간에 더 이상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파키스탄 영공이 폐쇄되어 공항 입출국은 금지되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한국의 회사도 가야하고 이번 학기 한국어 공부도 꼭 이수하고 싶어서 다양한 경로로 출국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일주일쯤 후 일요일 아침에 전화가 왔다. 인천에 도착했으니 안산에 가서 차를 가지고 음성으로 와 공부하러 갈 건데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한다. 입국 사연이 절절하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은 이용할 수 없으니 집에서 6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북쪽에 있는 페사와르로 가서 2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남쪽에 있는 카라치 공항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카라치 공항에서도 표를 구할 수 없어 한국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 날 새벽 다시 카라치 공항에서 다행히 표를 구해 6-7시간 비행 끝이 태국 방콕 공항에 도착했다. 방콕에서 다시 인천공항으로 5시간 이상의 비행 끝에 아침 7시 30분쯤 도착했다고 한다.

한국어 공부가 뭐기에 3일가량을 절박한 심정으로 노심초사하며 한국에 왔다. 갖은 고생을 했고 경제적인 지출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인천에서 안산으로 갔는데 동절기에 한 달가량 주차해둔 차량이 시동이 걸리지 않아 수리하다 보니 결국 수업에 못 왔다.

가까스로 출석 시간을 채울 마지막 방법까지 무산됐다. 수업이 다 끝난 후에 와서 그간의 고생한 사정을 이야기하며 출석 시간을 채워달라고 애원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해 주고 싶었지만 임의로 정해진 규정을 어길 수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번 학기는 안 되고 다음 학기에 다시 공부를 하라고 했더니 장신에 체격도 크고 목소리도 쩌렁쩌렁한 학생이 아기처럼 눈물을 보였다. 영공 폐쇄가 풀리면 천천히 와도 될 것을 출석 시간 채우려고 갖은 고생을 하며 왔는데 단계 이수가 안 된다는 교사의 말이 얼마나 매정하게 들렸을까. 자신도 정해진 규정을 이해한다면서도 아쉬움과 서운한 마음을 다 내게로 쏟아내는데 절박하고 간절했던 마음이 아프게 전해진다. 누군가에겐 내가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에 버스를 기다리고 비행기를 기다리며 매우 간절한 시간이었다는 게 강한 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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