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가 웃었다
고구마가 웃었다
  • 최명임 수필가
  • 승인 2018.11.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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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명임 수필가
최명임 수필가

 

서툰 농부의 밭에도 무리 없이 가을이 왔다.

흙살을 헤집고 호미가 요동칠 때마다 결실이 고랑에 쌓여간다. 막 탯줄을 끊고 나온 붉은 알몸을 보듬고 안사람이 웃는다. 밭고랑에 지폐가 보인다.

캐는 수고를 생각하니 나눠 먹기 거북하다. 비만인 남편은 숨이 차고 나는 아예 퍼질러 앉아 씨름한다. 서방님은 줄기를 걷느라 진땀을 빼고 어머니 굽은 허리가 신음하고 있다.

고구마 한 상자에 들어 있는 수고의 양을 먹는 사람은 헤아릴까. 문득 토리 녀석이 밥상머리에서 올리던 기도가 떠오른다. 유치원 아이도 하는 감사기도를 나는 언제 해보았을까.

남편은 진을 다 빼고 흙투성이 된 장갑을 벗어 던지며 고생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작물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해보잔다.

“그것을 추구하다 망조 든 인생 꽤 많지요. 논담을 좀 해볼까요?”웃으며 바짝 다가앉았다. 90kg 거구가 퍼질러 앉아 허허허 웃는다.

절로 피는 들꽃이라 했는가. 거저 얻은 것은 없으니 굳이 파보지 않아도 돌 틈을 파고들다 생긴 상흔이며 굴곡진 뿌리, 해충에 쏘인 생채기가 벌겋게 열 오르기 한 두 번이었을까. 또한 들꽃의 가을을 위해 보내온 햇볕과 바람과 비의 진정은 어쩌고.

고구마같이 편할라, 하고 심었는데….

첫해는 고추를 심어 얼추 200근을 땄다. 다섯 형제의 김장 고추와 고추장 거리와 일 년 양념으로 푸짐했다. 다음해는 고추를 줄이고 고구마를 심어 두루 나눠 먹었다. 뜻밖의 장사로 수입까지 있어 어머니 용돈으로 드렸다.

지난해는 그 돈맛에 욕심을 부리다 낭패를 보았다. 고구마는 풍작이었다. 늦게 캔 것이 화근이 되어 모조리 썩어버렸다. 다디단 고구마가 썩으니 쓴 듯 단 듯 변절자의 냄새같이 역겨웠다. 생계를 위한 농사였으면 우리 집 경제가 휘청거릴 뻔했다.

흙살 좋은 골에 살진 고구마가 눈이 뻐근하도록 나온다. 돈이라 생각하니 사랑스럽다. 어인 일인지 위쪽으로 갈수록 겨우 한두 알 품었거나 뿌리만 간신히 내렸다. 돌덩이 같은 흙살 탓인가. 나눠 먹자던 초심이 변질하니 가을이 동티를 냈을까, 속이 상했다.

남편이 한 고랑 건너 계시는 어머니 들으실라, 낮은 소리로

“욕심 버리고 고마운 이들과 나눠만 먹자. 어머니께는 잘 팔았다고 말씀드리고 용돈 드리면 되지.” “거짓말을? 그려, 하얀 거짓말.”

가슴에서 훅, 무언가 빠져나갔다. 웃음이 터지는데 사방에서 고구마가 따라 웃는다. 사래도 긴 밭에 널브러진 욕심이 사라졌다.

하나 둘 주인을 찾아 떠난 뒤에 아들은 후덕한 손으로 어머니께 용돈을 드렸다. 고구마 나눈 것이 무슨 대수라고 창고를 비우고 나니 마음이 뿌듯하다.

따스함이 그리운 계절이다. 네 살 토리 녀석, 여름내 해님이 밉다고 그늘만 찾더니 요즘 그늘이 밉다며 콩콩 뛰어가 해님 어깨 기댄다. 한뎃잠 자는 이들, 이불이 필요한 계절이다.

구세군의 냄비가 달궈지는 계절이면 세간에 화제가 되는 인물이 있다. 이름을 감추고 소중한 것을 내놓는 사람, 그 대가로 얻은 행복한 전율을 알 만하다. 그깟 고구마나 소액의 기부로 얻는 내 즐거움과 비교하랴. 나와 다른 차원 높은 행복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지난 극염도 모자라 겨울 혹한을 예고한다. 온기를 나누면 혹한도 녹아내릴 테니 이왕이면 나도 큰 무엇을 내놓고 싶다. 가난이 죄인지 욕심이 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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