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나무
석류나무
  • 이창옥<수필가>
  • 승인 2016.06.3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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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가게 뒷마당에 석류나무 한그루가 있다. 해마다 봄꽃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을 피워 모두를 유혹해도 천하태평이다. 다른 나무들이 겨우내 긴 잠을 털어내고 연초록 새싹을 밀어올리느라 소란스러워도 도통 다른 세상일이다. 혹시라도 매서운 겨울바람에 얼어 죽었나 걱정되어 가지 끝을 살짝 꺾어본다. 푸른 기운이 역력하여 진득하니 기다리지 못하고 기어이 가지를 꺾어낸 조급한 마음이 무안하다.

늘 그랬다. 해마다 다른 나무와 달리 시나브로 싹을 틔우는 것을 십년 넘게 보아왔으면서도 매해 가지를 꺾고 나서야 후회를 한다. 다른 나무들이 겨울 냉기를 털어내고 꽃을 피우며 싹을 푸르게 키우는 동안에도 요지부동이다. 석류나무는 봄꽃들의 소란스런 향연이 끝날 즈음 봄의 기운에 화답하듯 삐죽이 새싹을 밀어올린다.

기다림의 날들이다. 나무의 잎이 제법 무성해지고 가지에 힘이 오르면 석류나무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작은 꽃망울을 달기 시작한다. 석류꽃은 짧은 시간 눈부시게 피었다가 허무하게 지는 꽃이 아니다. 결코 한꺼번에 소란스레 꽃을 피우지도 않는다. 미리 피어날 순서를 정해서 약속이라도 했는지 콩알만 한 작은 꽃망울을 부풀리며 한 달 내내 이가지 저가지에 선홍색 꽃등을 밝힌다.

석류나무는 볼수록 경이롭다. 꽃잎이 지고 난 자리에 버젓이 꽃이 또 피어난다. 처음에는 정말로 한 몽우리에서 두 번 꽃이 피는 줄 알았다. 분명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별을 닮은 꽃이 피어 있으니 말이다. 한참 지난 뒤에야 꽃이 아니라 꽃받침이란 걸 알게 되었지만 꽃받침인데도 어쩌면 그리 꽃인 양 시침을 떼고 열매를 키우는지 나무의 천연덕스러움에 바라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일을 하다 잠시 바람을 쐬러 뒷마당을 서성거리다 나무를 처음 보았다. 12월 한겨울이라 볼품도 없는 앙상한 가지가 무슨 나무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봄이 오고 꽃이 핀 후에야 석류나무임을 알았다.

주변머리도 없는 내가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만 하는 일이 유난이 힘든 날이 있다. 그러면 잠시 일손을 멈추고 뒷마당으로 나간다. 고객과 마찰이 생겨 잘못이 없는데도 생계를 위해 고개를 숙인 날도, 입이 걸은 고객에게 욕바가지를 뒤집어쓴 날도 어김없이 뒷마당을 서성이며 나무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나무를 바라보면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십년 이상을 나무에 새싹이 돋고 꽃이 피며 열매를 키우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분명 다른 나무보다 느리지만 여유와 인내가 어떤 것인지, 기다림이란 게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평생을 한자리에 붙박여 풍요로운 열매를 위해 나무가 견뎌내야 하는 것들이 결코 수월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 모습은 사람들이 살아내는 세상살이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올해는 석류나무가 해거리를 하려나 보다. 꽃등이 드문드문 켜졌다. 지난해 가지가 휘어지도록 탐스럽게 열리더니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다음해를 위해 모든 걸 접고 해거리를 하는 나무의 지혜로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오늘은 해거리하며 휴식을 할 줄 아는 나무가 마냥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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