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의 안정복 선정비
독립기념관의 안정복 선정비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5.09.15 1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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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 <천안·아산>

“부모에 효도하고, 웃어른을 존경하고, 주민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자손들 잘 가르치고, 각자 생업에 열중하고, 비위는 저지르지 말라.”

‘동사강목’으로 유명한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정조 즉위년인 1776년 10월 목천현감에 부임해 주민에게 강조한 6개 조목이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정년을 훌쩍 넘긴 65세에 지방관이 됐다. 세손일 때 정조 훈육을 맡은 게 인연이 된 듯하다.

의욕적으로 행정을 펼쳤다. 주민 부역 부담을 줄이고, 향약 시행으로 향촌사회 질서를 회복하려 힘을 썼다. 이같은 행정적 치적보다 더 의미있는 일은 목천의 향토지(誌)를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준 사실이다.

1779년 그가 목천을 떠나자 2년 후 주민들은 선정비(碑)를 세웠다. 이 비가 독립기념관 제7전시실 옆 잔디밭에 서 있다. 당초 천안시 북면 연춘리 복구정 옆에 있었는데 보존상의 문제로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립기념관 한켠에 거의 방치하다시피 ‘보존’되고 있다. 아무런 안내문도 없이 홀로 덩그러니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다. 독립기념관 전시물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으니 홀대를 받을 수밖에 없다.

2008년 개관한 천안박물관이 다음 달 야외전시장을 조성한다. 하지만 내세울만한 야외 전시물은 없다. 수년 전 천안 중앙시장에서 출토된 천안군수 선정비 2개, 홍경사터 건축 석재가 고작이다.

그래서 향토사학계는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진 안정복 선정비가 천안박물관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독립기념관에 볼품없이 서 있느니 천안박물관으로 옮겨져 시민들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게 옳지 않냐는 생각이다.

안정복은 2년 9개월간(1776년 10월~1779년 6월) 목천현감으로 재직했다. 비교적 오랜 기간이다. 그는 고을 수령으로선 이례적으로 마을역사 복원에 나섰다.

“동국여지승람에 포함된 목천 내용은 너무 적고, 읍지가 있으나 너무 빠진 게 많아 참고할 게 없다”며 새향토지 ‘대록지’(大麓은 목천 옛이름) 편찬을 주도했다. 고을 양반들에게 향토자료 수집을 요청했다. 6개월에 걸쳐 성씨, 산천, 학교, 묘소, 사찰, 누정, 인물, 고적, 서적 등에 대한 것을 모았다. 나라에서 편찬한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보다 더 많은 내용을 포함시켰다.

현재 천안시가 충남연구원에 의뢰해 진행하는 마을역사 아카이브(기록화) 사업의 원조격 같은 일을 했다. 사학계에선 18세기 읍지 편찬의 추이를 잘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모범적 읍지로 평가하고 있다.

선정비와 관련해 흥미로운 일이 그의 연보(年譜)에 보인다. 목천현감이 된 지 얼마 안 돼 그를 칭송하는 목비(木碑)들이 세워졌다. 이를 보고 당장 뽑아 버리게 했다. 이유는 이렇다. “조금이라도 혜택이 있으면 비를 세워 칭송하니,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목비를) 쪼개 버릴 것이다.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는 것은 관장(官長)을 가지고 노는 뜻이 있으니 아름다운 풍습이 아니다.” 그런데 퇴임 후까진 반대하지 못해 선정비가 섰다.

선정비는 수령들이 주민들을 부추겨 억지로 만들기도 해, 조정에서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반면 안정복처럼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으로 세우기도 했다.

안정복 선정비는 천안시민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랑스럽게 서 있어야 한다.

독립과는 직접 관련성 없는 비석이 독립기념관 구석에 서 있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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