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산에서 청주를 보다
우암산에서 청주를 보다
  • 박상일 <역사학자·청주문화원부원장>
  • 승인 2015.01.2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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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단상

박상일 <역사학자·청주문화원부원장>

대한이 지나고 입춘도 열흘 남짓 남았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겨울도 서서히 물러가는 느낌이다. 날씨가 풀려서인지 평일인데도 우암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간간이 잔설이 남아 있지만, 등산로는 설빙보다는 얼었던 땅이 녹아 질퍽해진 진흙으로 인해 더 미끄럽다. 진달래 철쭉 가지 끝에 돋아난 몽우리는 언제라도 터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이다. 

신발에 달라붙은 흙더미를 털어내고 땀도 식히며 쉬엄쉬엄해서 정상에 서니 바람도 시야도 마음도 시원하다. 넓은 분지에 형성된 청주가 영락없는 대도시의 면모이다. 그런데 보고 또 보아도 어딘지 어색하고 낯설어 보인다. 청주시의 외곽은 아파트 숲에 완전히 둘러싸였고,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방풍림을 방불하게 한다. 몇년전만 해도 청주의 북쪽인 율량동 뒷산에는 숲이 있어서 그나마도 몇가닥 머리카락은 보인다 싶었는데, 이제는 그곳마저 마천루들이 전투대형으로 청주를 에워싸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도시와 농촌의 모습도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역사가 있는 도시라면 그만의 문화적 향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청주는 오랜 역사도시이다. 문헌기록에는 백제의 상당현부터 시작되지만, 그 이전에도 독자적인 지방세력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 신봉동 고분군을 통해 확인되고, 궁성(宮城)과 다름없는 정북동토성은 당시 청주의 위상을 알려준다. 이어 685년 서원소경이 설치된 이래 오늘날까지 지방행정과 문화의 거점으로 충실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청주의 원도심지역에 아름답게 서 있던 읍성은 일제강점기에 헐리고 그 많던 병영과 관아 건물들도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모두 사라졌다. 성안길은 청주 역사의 중심이며, 그곳에 청주 역사의 영욕이 숨어 있다. 

지난주에는 읍성 동문터 맞은편의 아파트부지 발굴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와 고려시대의 우물터 2곳이 확인되었다. 최근 몇년간 실시된 읍성주변에 대한 발굴조사와 비슷한 성과로서 청주 원도심지역에 서원소경의 계획도시가 형성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청주의 역사가 고스란히 퇴적되었음을 보여준다. 개발지역을 대상으로 부분적인 발굴을 하다 보니 아직은 청주의 옛 모습을 완전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유구와 유물들을 통해 청주의 원형이 퍼즐처럼 맞추어지고 있다. 

근현대유산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이면 마땅히 보존되어야 한다. 역사의 강줄기는 단절될 수 없다. 상류도 있고 중류도 있고 하류도 있어야 물이 흐르고 역사도 흐르기 때문이다. 현 충북도청이나 청주시청 또한 중요한 근대건축물이다. 실제 충북도청 본관은 등록문화재로 문화재청에 등록되기까지 하였고, 시청본관은 건축가 강명구가 설계하여 1965년에 준공된 건물로서 청주의 별칭인 주성(舟城)을 상징하여 배 모양으로 설계하였다고 하니 역사적 상징적 의미가 크다. 요즘 통합 청주시의 신청사 문제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 중에 이승훈 청주시장이 고층의 신축청사 건립보다는 기존 건물의 재활용이 더욱 효율적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쌍수를 들고 태극기 휘날리며 환영할 일이다. 청주시내 어디를 발굴해 보아도 땅속에는 청주의 역사가 켜켜이 문화층으로 남아 있다. 그 위에 덧쌓인 근현대의 역사도 보존할 대상이다. 무엇보다 원도심지역만큼은 제발 스카이라인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중세 모습 그대로의 유럽 도시들, 길게는 당(唐)나라, 짧게는 명청(明淸)시대에 형성된 중국의 고성(古城)과 고진(古鎭), 그리고 인산인해의 물결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그런데 청주읍성 동문밖에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다니 어찌할꼬. 아! 이를 어쩌면 좋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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