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여행
추억 여행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4.07.10 1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비가 오락가락하는 오후! 초록빛 우산을 들고 추억의 냄새 폴폴 날리는 헌책방에 갔다.

오래전에 밤을 새워 읽었던 책들, 그러나 지금은 내 기억의 창고에서 가물거리는 책들! 어느 순간인지 내 책장에서 자취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그 책들이 그곳에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내 푸르렀던 시절의 추억을 꺼내듯 이 책 저 책을 꺼내어 보았다. 누렇게 퇴색된 책들이 지난 시간을 담고 느긋하게 발효되어 있었다. 한하운, 랭보, 잉게보르크바하만 등 그 시절 가슴에 담았던 활자들을 눈에 가득 담았다.

오랜 기억을 펼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펼쳐진 책들에서 가지가지 사연들이 뚝뚝 떨어졌다. 어떤 책을 열자 ‘아름다운 한 권의 시집을 사랑하는 ○○에게 드립니다. 82년 8월 19일’이라는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30년 전에 어떤 이가 사랑하는 이에게 써준 예쁜 사연이 어제 쓰인 것처럼 웃고 있었다. 30여 년 전의 어느 날 사랑하는 이를 위해 떨리는 가슴으로 꾹꾹 눌러썼을 볼펜 자국이 아직도 그 자리에 꾹꾹 붙박여 그 사람의 애틋한 마음을 전해주는 듯했다. 또 다른 어떤 책을 열자 그 속에는 오래전 계절을 접어 갈피에 소중히 넣어 두었을 꽃잎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그 꽃잎은 노랗게 퇴색되어 있었지만, 어느 소녀의 계절을 잡아두고 싶었던 예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세월은 그렇게 정처없이 흐르고, 사람들의 손때 묻은 기억을 간직한 책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 책을 보는 동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여 뭉클했다. 오래된 책을 보면 그것의 내력을 상상하게 되어 가슴이 벅차오른다. 삼십 년 전의 사연과 삼십 년 전의 사람들의 체온을 담았던 책에 내 손을 포개며, 그 시절의 사람들과 무엇인가를 공유하며 시공을 넘나든 듯한 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제는 세월 속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낡은 시집들을 들추며 살포시 웃고 있는 내게 책방 아저씨 “이상 시집도 필요하지 않으세요? 보여드릴까요?”하며 말을 걸어왔다. 난 아저씨가 시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 못내 기뻐서 “주세요. 필요하죠. 이 집에서 제일 오래된 것으로 주세요.”라고 하여 책을 손에 쥐었다. 이상을 손에 넣고 나니 고교시절 읽었던 그리스로마신화가 불현듯 보고 싶어졌다. “아저씨 그리스 로마 신화 찾아 주실 수 있나요?”하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저씨는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들 틈에서 용케도 찾아오셨다. 그 책을 보니 이번에는 우리나라 신화가 기록된 삼국유사도 갖고 싶어졌다. “삼국유사도 찾아 주실 수 있나요?” 이번에도 득달같이 찾아오셨다. “헐~ 어떻게 그렇게 대번에 찾으세요?”라고 감탄하자, 아저씨는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여기도 나름대로 법칙이 있다우. 한번 들어온 책은 내 다 기억하지.”라고 하며 싱글벙글이었다.

오늘,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와 책 하나하나에 오늘 날짜와 구입한 곳 그리고 갖고 싶었던 이유를 기록했다. 먼 훗날 이 책 앞장에 쓰여진 책의 내력을 보며 나는 또다시 아련한 추억에 젖을 것이다. 세월이 흐른 후 누군가 이 책을 본다면 오늘의 나처럼 이 책에 담긴 추억의 내력을 상상하며 가슴 뭉클한 행복감에 젖길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