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파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문창극 파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14.06.12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말에… 一筆
총리 임명이 또 기로에 섰다. 예정대로 문창극 후보에 대한 청문회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그 과정은 순탄치가 않을 조짐이다. 총리임명이 공전됨으로써 국정운영의 차질은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선 국민들이 느낄 상실감이 더 큰 걱정이다.

상대적으로 나라의 구조적 역학관계에 자유로울 수 있는 최초의 언론인 출신,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개혁이라는 임무수행에 적격일 거라는 기대감이 컸건만, 이것이 허무하게 무너진다면 이보다 더한 국민의 정서적 생채기도 없다.

어쨌든 문창극 내정자는 현재 자신에게 쏟아지는 설화(舌禍)에 대해 분명한 해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등 등의 문제성 발언이 본인의 주장대로 강연 전체가 아닌 극히 일부만을 침소봉대한 왜곡된 것이라면 그 전후를 가감없이 드러내 국민들의 판단을 구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것조차 상식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할 경우 그의 총리 임명은 지금으로선 기대난망이다.

문창극 파문의 와중에서 예외없이 불거진 것이 또 있다. 현행 청문회 제도에 대한 실효성 문제다. 더 이상 완벽할 수가 없다고 평가받던 안대희조차 청문회 한방으로 졸지에 부도덕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사라진 것에 큰 상처를 입은 ‘여론’이 빌미가 됐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의 청문회라면 제 아무리 예수와 공자님을 그 자리에 앉혀놔도 배겨날 재간이 없다. 자잘한 신상과 가족내역까지 깡그리 파헤쳐지고 거기다가 수십년 전의 일까지 들춰지는 상황이라면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물만 먹지 않는 한 누가 내정되더라도 100% 낙마한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청문회라는 제도를 손볼 수는 없다. 섣불리 고친다고 나섰다간 정치권이 그것으로 해를 보낼 게 뻔하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고위직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대한민국의 공직문화를 개혁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순기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치세(治世)를 위한 높은 자리에 앉으려면 수신제가부터 해야 하고 아무나 그 자리를 탐하면 안 된다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줬다. 더구나 야당의 입장에선 권력이나 집권당에 대한 적절한 견제장치가 돼 잘만 활용하면 얼마든지 상생과 소통의 국정운영을 선도할 수 있다.

결국 국민이 바라는 것은 청문회 통과라는 절차가 인사의 궁극적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 보다는 당사자가 앞으로 나라를 위해 얼마나 일하고 기여할 수 있느냐를 가늠하고 판단하는 것에 청문회의 초점이 맞춰져야 하고 이를 위해선 국민 스스로가 청문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일탈을 지적하고 응징하는 것 못지 않게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궤적과 주변 평가를 중시해 앞으로의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바로 엊그제 지금의 청문회 난국(?)을 예견이라도 한 듯 아주 흥미있는 책이 나왔다. 세종대왕 연구의 대가 박현모 박사(한국형 리더십개발원 대표)가 쓴 568쪽의 <세종이라면>이다. 그는 지난 2009년 3월 27일 있은 충청타임즈 주최 초정학술세미나에 토론자로 나서 “세종의 리더십이 앞으로 한국을 구할 것”이라고 역설해 주목을 받았다.

그와 책에 따르면 세종의 조선초기에도 서경(署經)이라는 일종의 인사청문회 제도가 있었다. 나라의 관리를 등용할 때 사헌부나 사간원이 서명을 해주는 것이다. 세종은 종종 이로 인해 조정대신들과 갈등을 빚었지만 그 때마다 점찍은 능력자가 있다면 “인재가 길에 버려져 있는 것은 나라 다스리는 사람의 수치다”면서 출신과 단점은 물론 과거를 불문하고 등용을 밀어 부쳤다. 결국 세종리더십은 잠재적 인재에 대한 자기만의 경영이었던 것이다.

이래서 탄생한 것이 조선 500년 최고의 재상 황희정승이었다. 황희는 서자출신인데다 젊어서는 뇌물도 여러번 받았고 외간녀와 간통도 했다. 당연히 신하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세종은 “그의 단점은 내가 안다. 단점은 막고 장점만 드러나게 하겠다”며 황희를 중용했다. 영의정으로 18년을 지낸 조선왕조 최장수 재상, 반만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고의 청백리로 추앙받는 황희정승은 이렇게 탄생했다. 집이 가난하여 새는 비를 피하려고 집에서도 삿갓을 썼고, 아내와 딸은 옷이 없어 치마 한 벌을 서로 돌려가며 입었다는 황희정승의 청백리 전설은 밖으로 드러난 결함이 아닌 안에 숨어있는 잠재력을 인정해 준 사회적 공감대의 결과물인 셈이다.

문창극은 총리내정 후 마지막으로 이렇게 대학강연을 했다고 한다. “어느 사회나 갈등이 있지만 우리에겐 되돌아 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균열이 생겼다. 불신의 사회를 극복하지 못하면 나라는 퇴락한다.”

과연 그가 우리나라를 짓누르고 있는 끝간데 없는 불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가져 올 지, 아니면 또 한번 애먼 사람의 갑작스런 추락을 이어갈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청문회는 오로지 약점과 치부만을 난도질하는 인격의 살육장이 아니라 희망과 가능성을 싹틔우는 묘상(苗床), 못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