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이다롱이 달고 길 떠나기
아롱이다롱이 달고 길 떠나기
  • 전영순 <문학비평가·수필가>
  • 승인 2014.03.16 1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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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스크래치
전영순 <문학비평가·수필가>

여행은 눈뜨고 꾸는 꿈이라 했던가! 그래 요즘 같이 권태로운 시기, 졸고 있는 감정을 깨우기 위해 눈뜨고 꾸는 꿈이라도 꿔 봐야겠다. 이십 년이 되도록 제주도 한 번 못 가 봤다는 아들을 핑계 삼아 제주도로 여행하게 됐다.

여행 일정을 제주도로 잡은 건 얼마 전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하시는 분과 대화를 나누던 중 자극을 받고서다. 그곳에서 도움받는 학생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영세 가정의 아이들이다. 대부분 야간과 휴일에도 일하는 맞벌이 부부가 많아 부모를 대신해 방과후에는 학습지도를 하고 겨울에는 제주도와 스키장도 다녀온단다.

경제적, 시간적이라!

남들이 보기에 우리 가정이 문화 혜택을 많이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우리 아이들이 지역 아동센터에서 위탁받고 있는 아이들보다도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했다.

순간 이번 봄방학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 데리고 제주도를 다녀오기로 했다.

그날 밤 화살은 일벌레인 남편에게 돌아갔다. 다른 집 남편들과 비교 대상이 될 때면 늘 죄인이 되어 버리는 아이 아빠가 선뜻 여행을 가잔다. 큰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가족사진에 아빠는 없었다. 밤낮 연구실에서 생활한 그에게 가족과 여가 선용한다는 건 사치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여행이란 꿈도 못 꿨다. 물론 경제적 뒷받침도 되지 않았다. 그날 밤 인터넷으로 가장 싼 여행 패키지를 예약했다.

열심히 산 덕에 이제 겨우 밥 먹고 사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미안한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일벌레인 남편이 떠나기 이틀 전 세미나에다 학회준비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며 아주 조심스럽게 말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혼자서 아이 셋을 데리고 여행하게 됐다. 훌쩍 커 버린 아이들을 보니 이번 여행을 통해 그간의 미안함을 만회한다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어느덧 아이들이 엄마인 나를 보호하려 든다.

딸은 제주도의 역사와 관광지를, 까칠한 장남은 맛집을, 수더분한 차남은 누나와 형이 정한 코스에 놀이기구 하나면 만족하단다.

나는 제주도를 세 번 다녀왔다. 나름 아이들에게 내가 좋아했던 코스를 보여주고 싶다.

도착하자마자 까칠한 장남이 제주 시내에 있는 똥돼지집으로 가잔다. 맛있게 먹은 우리는 이를 쑤시며 숙소인 서귀포로 향했다. 서귀포 바다는 우리를 환대라도 하듯 윤기를 머금고 짜르르 떨고 있다. 넘실거리는 바다가 에워싸인 제주도에서 아이들이 많이 걸으며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계획이다.

이른 시간 성산 일출봉에 올랐다. 아이들은 힘들게 올라왔지만, 신기한 듯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말이 없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려오는 길, 선착장에서 해녀들이 노래를 부르며 관광객들에게 물질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동차 안에서 아이들은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반복한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들렀다. 건초들이 하늘거리는 용눈이 오름과 만장굴, 비자림, 천지폭포, 중문단지, 초코릿박물관, 추사 유배지, 제주 전쟁역사평화박물관 등을 보고 돌아오는 길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지인 서연의 집을 마지막으로 여행 일정을 마쳤다.

취향이 각각인 아이들은 제주도 전쟁역사평화박물관에 들렀을 때 다녀온 동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왜 이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지 조금이라도 느낀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신학기에 까칠한 아들이 부모 곁을 떠난다. 아이들에게는 홀로서기 연습을, 엄마에게는 놓아주기 연습을 위한 시간이었다. 여행은 눈뜨고 꾸는 꿈속에서 현실을 향한 다짐의 출발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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