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자랑 '직지'
대한민국의 자랑 '직지'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06.09.1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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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사적 견지에서 본 직지 서체 … 3. 직지서체의 근원-청주지역 서예와 직지서체

청주 특유 고삽미, 직지 비정형 서체와 일맥상통

발견된 서사자료로 짐작 불교문화 발달

   

고려말의 청주는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불경을 인쇄하는 등 불교문화가 융성해 백운화상의 저서로는 법문집인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과 프랑스 파리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2권이 있다.

금속활자로 인쇄를 할 수 있으려면, 여러 조건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요건은 글씨, 종이, 먹, 책의 수요, 활자주조기술과 시주 등이다. 이러한 활자문화의 필요요건을 볼 때, 당시 서예문화 없이는 인쇄문화가 도저히 발달할 수 없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청주지역의 인쇄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지리적인 요인은 이 지역에는 큰 산과 계곡이 없어서 삼국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불사가 이뤄져 왔다. 이러한 환경적인 원인이 직지를 발간하게 된 요인이 됐으며, 청주를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성행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양반의 비율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 발달된 서예문화가 있었을 것이다. 청주지역에 분포돼 있는 불교유적과 사찰 및 절터를 정리, 청주와 인근지역을 중심으로 직지가 간행된 당시를 전후해 금석문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를 살펴본다. 그리고 청주지역에서 나타난 서적을 통해 직지 서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본다.

지금까지 전하는 청주지역에서 발견된 서사자료들은 대부분 불교에 관련한 것들이다. 여기에서 청주지역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청주지역에 불교문화가 매우 발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사찰을 중심으로 목판인쇄와 금속활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선필이 중국서풍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발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청주지역 내지 인근지역에 있는 서적들을 보면 직지의 서체와 직접적인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서적들이 많다.

운천동 사적비(686)는 청주에서 발견된 비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것은 삼국이 통일된 지 얼마되지 않은 해에 제작된 것으로 중국서예의 수용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다. 전체적인 조형상으로 볼 때 정형화된 당나라의 해서를 근간에 두고 있으면서도 북위서에서 느낄 수 있는 방필과 대소의 대비를 강조하고 있으며, 유려하고 활달한 필치가 느껴지는 글씨다.

용두사지 철당간과 당기(962)는 당간에 주조된 글씨가 쓰여진 시기는 이미 중국의 해서들이 국내에 많이 유입되어 영향을 받고 있는 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간에서는 중국의 해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상이한 표현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결구상으로 볼 때 무작위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같은 글자에서 동형반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정형이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통일신라 이전에 신라고비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직지서체의 특징과 맥락이 닿아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직지의 서체와 닮은 자가 나타나고 있으며, 독특한 느낌이 있는 토속적인 글자들이 직지의 금속활자가 만들어지기까지 400여년간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청주지역의 서예문화가 중국의 서체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 지역 특유의 서풍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청주 지역의 토착민들이 토속적인 서예의 미의식을 가지고 전승시켜 왔다는 것을 입증한다.

흥덕사지 갑인명청흥덕사지(1194년 혹은 1254년 추정)는 직지가 제작된 흥덕사지에서 출토된 금고다. 서체성으로 볼 때 사뇌사지 기유명청동금고와 필체상으로 매우 유사한 점이 있지만 더 활달하며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사뇌사지 기유명청동금고(1249년 추정)는제작 시기가 기유년인 것으로 보아 1249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시주자인 郭씨는 청주의 토착 성이며, 장인이 姓을 가지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금고에 새겨진 글씨는 해서에 행서를 가미한 글씨다. 운천동 사적비와 용두사지 철당간과는 달리 직접 칼로 새겼기 때문에 모필서사에서 표현되는 필획의 맛을 느낄 수는 없지만, 결구와 장법에서 당시 청주권 서예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원흥사지 목판본은 직지의 금속활자 제조시기와 장소가 거의 같아 직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보며, 서체 또한 직지서체에 직접적인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본다.

흥덕사지의 직지서체와 원흥사 금강경의 서체를 비교분석해 본 결과 두 서체가 하나의 큰 흐름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서풍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청주지역 고유의 토속적인 고졸의 미가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으며, 직지의 글자 중 어떠한 글자든지 원흥사 금강경의 글자와 비교해보면 거의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글자는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같은 사람이 썼다고 할 만큼 닮아 직지보다 70여년 전에 만들어진 금강경의 글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운천동 사적비, 용두사지 철당간, 흥덕사지갑인명청동금고, 사뇌사지기유명청동금고, 운천동사지기사명청동금고, 원흥사지금강경에서 나타난 필체를 직지와 비교분석해 보면, 첫째, 옆줄을 맞추지 않고 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둘째, 글자크기에 관계없이 자유분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셋째로 청주지역 특유의 고삽미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들 모두가 직지에서 나타난 비정형의 서체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이러한 청주지역의 서예는 전체적인 이미지에서 동형성의 서맥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또한 이들이 위치한 곳은 직지를 만든 흥덕사와의 거리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고, 서품이 중국의 것과 상이하며, 400여년의 시차가 있었음에도 같은 필맥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은 청주지역의 서예가 중국문화의 영향하에서도 특이하게 조망되는 것은 이곳에 있는 수십개의 사찰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융성했으며, 선을 중심으로 한 서예문화가 지속적으로 융창 지속되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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