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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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9.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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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쳐라!
강 대 헌 <청주기계공고 교사>

도시를 떠나 시골에다 집 짓고 산다는 어느 목판화가는 말했다, "허장성세(虛張聲勢)는, 식빵 부풀어 오르는 그쯤으로 족하지"라고. 실속은 없으면서 큰소리 치거나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로만 가득 찬 세상은 너무 배부른 풍선처럼 되어 이내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역경(易經)에 나온다는 '모든 사물의 근본은 같으나 모든 사고는 같지 않으며, 그 목적은 같아도 그것에 도달하는 길은 다르다'는 말을 대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모든 사물의 근본은 '진(眞)'이며, 모든 사물의 목적은 '성(誠)'이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세상은 모든 사물의 근본은 '위(僞)'이며 모든 사물의 목적은 '장(裝)'인 것처럼 소란스럽게 거품만 일고 있는가.

우리들이 까맣게 잊고 있는 소중한 이름을 다시 찾고 싶다.

아주 아프고 쓰린 시 한편을 읽었다.

'제 이름 부르며 스스로 울어봐야지제 속의 비명을 꺼내 소리쳐봐야지소나기처럼 땅에 패대기쳐봐야지바람의 몸을 길들여봐야지늪처럼 밤새도록 뒤척여봐야지눈 알속에 박힌 모래처럼 서걱거려봐야지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 돌아봐야지어느 날 문득 절필해봐야지죽어라고 살기 위해 잡문을 써봐야지사람 때문에 마음바닥이 쩍쩍 갈라져봐야지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봐야지마침내 갈 데가 없어봐야지그때야 일어날 마음의 지진.' 천양희, '마음의 지진'

이 때, 내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을 물리칠 수 없었다.

'마음의 지진(地震)이 일어날 때 당신은 마구 몸을 떨며 좌우로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천 길 낭떠러지 심연의 바다로 그렇게 떨어지고 말 건가요' 그리곤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그 곳에서'필(必)'자 모양으로 온몸을 꽁꽁 결박 당한 채 서러운 울음만을 내쏟다가 지치고 지쳐 잠들고 말 건가요. 진액이 다 빠져버린 벌레의 껍데기 같은 게 바로 당신의 텅 빈 모습이군요. 그래선, 안 되겠지요. 천 만 번 마음의 지진이 당신을 때리더라도, 당신은 선(善)한 웃음을 잃지 마세요. 당신은 넉넉한 가슴으로만 말해 주세요. 당신은 열정의 핏줄과 힘줄로 다시 일어나 주세요, 그런 당신의 이름은 내가 아니랍니다. 당신의 이름은 '타인(他人)'이랍니다. 당신은 거룩한 나의 이웃, 타인이랍니다. 지금도 나를 대신해서 아프고 쓰린 존귀한 사람이랍니다. 그런 당신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당신은 나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설령 내가 당신을 천만번 버릴지라도, 당신만큼은 나를 붙들어 주세요.'

198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비행청소년과 시민을 연결하여 보호하는 '소년자원보호자' 제도를 만든 서울고등법원 윤재윤 부장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타인에게 원하는 그대로 타인에게 해주는 것이 인간관계의 황금률이다. 종교는 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친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마음에 있다.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느끼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런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홀로 눈물을 흘렸다. '가장 미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의 말은 고통 받는 사람을 돕는 것이 인간의 중요한 의무임을 깨우친다. 행복의 법칙은 단순하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수록 우리 내면에 자신감과 힘이 생기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감이 커진다. 자신의 돈, 즐거움, 경력에만 관심을 쏟고 타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둠을 피할 수 없다.'

우리들이 다시 찾아야만 할 소중한 이름인 타인은 우리들이 들뜬 허장성세도 버리고 두터운 위장의 갑옷도 벗어버릴 때, 우리들을 단단히 지켜줄 것이다.

'학생들에게 한 번 설명하고 교실을 둘러본 즉, 모두 눈을 멀거니 뜨고 앉아 있었다. 이해를 못한 것이 분명하다. 또 한 번 설명했는데도 여전히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 번째 설명을 했는데, 그 때에야 비로소 내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유명한 물리학 교수가 상급학년 학생들에게 양자론(量子論)을 가르치다 느꼈던 경험을 교육학자 브루너(J. S. Bruner)는 그의 책 '교육의 과정'에서 이렇게 소개했다고 한다.

그렇다. 나를 쳐야 한다. 자꾸 애꿎은 타인만을 몰아 세워서는 안된다. 적어도 자기 자신을 세 번은 내리쳐야만 진정으로 타인을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이 내 안에 소중한 사람으로 자리잡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국가(國歌) '하티크바(Hatikvah)'처럼 눈물의 골짜기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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