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작가. 한국문인협회>

장마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980년 중반 어느 여름날 일화이다.　

“상병이 너는 경제기획원 장관이다. 그리고 태열이 너, 너는 내무부 장관이다. 알았냐? 응?”

서울 인사동 천상병 시인이 운영하는 카페 ‘귀천’에서 자칭 대통령 박봉우 시인이 천상병 시인과 강태열 시인을 앉혀 놓고 하는 말이었다.　앞니가 다 빠져 합죽이 할아버지가 된 시인 박봉우 시인이 전주 시립도서관에 근무하다 휴가를 이용 상경했던 것이다. 1950년대 명동 엘레지 황혼병 환자들끼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 반가움이 오죽했겠는가. 오후 3시가 채 안된 시각인데도 다들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이 자식 봐라! 내가 대통령이지? 왜 니가 대통령이여, 임마!”

허연 머리칼에 발그레 취기가 오른 얼굴로 강태열 시인이 맞받아치며 나섰다.

“안뒤여, 안뒤?. 내가 대통령을 혀야 혀!”

시켜줄 사람들의 뜻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박봉우 시인의 고집은 요지부동이었다. 옆에 앉은 천상병 시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천진스럽게 마냥 헤헤거리고만 있었다.

박봉우 시인의 지론은 이렇다. 시인이란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사람이므로 시인이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야 이상 국가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상병 시인이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발탁(?)된 이유는 그가 서울대 상대에서 공부했다는 경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며, 강태열 시인이 내무부 장관으로 임용된 것은 정치를 모름지기 굳건한 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꾸려가야 하는데 바로 그가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야무진 ‘시인 공화국 건설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고 이들중에 박봉우, 천상병 시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강태열 시인만이 경기 부천의 지하방에서 노환에 의지하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유명한 고사중에 장수선무 다전선고(長袖善舞 多錢善賈)라는 말이 있다.

이 뜻은 소매가 길면 춤추기가 쉽고, 재물(밑천)이 많으면 장사를 잘 한다는 말이다. 실력과 조건을 잘 갖춘 사람이 성공하기도 쉽다는 비유로서 이 말은 지금 껏 전해오고 있다. 　

시인, 수필가,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 작가 등 각 장르별 문인이 있지만 유독히 시인(詩人)만이 한문으로 사람인자 앞에 붙어 다닌다. 사람보다 한 단계 높은 시인이 문학의 어떤 장르보다 위대하고 찬란하게 빛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으로 가는 길이 수월한 것만은 아니다.　

언제인가? 문단에 등단한지 얼마 안된 시인과 축하차 대포집에 앉아 물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의 시학(詩學)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느냐? 그랬더니 반색을 하며 그런 책이 있느냐고 하여 실소를 금치못했다.　

나는 문학적 스승님이 서울대 구인환 교수님과 한국교원대 성기조 박사님이시다. 구 교수님은 성품이 온화하시어 편안하게 가르쳐주시는데, 성기조 박사님은 대쪽같은 성격에 ‘그것도 글이라고 썼느냐? 글만 늘어놓는다고 다 시가 되는 게 아니야? 아리스 토텔레스 시학을 백번 이상 읽고, 다시 써 와!’ 하시며 혼내셨다.

그렇게 문학을 배우며 지난 1988-89년 2년에 걸쳐 지루한 1-3회 추천으로 한국 문단에 등단했다. 올해로 24년차 29권의 저서를 보유한 중견작가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지금도 습작생으로 겸허히 아리스토 텔레스의 시학을 끼고 공부하고 있다.　

긴 소매와 밑천을 제대로 갖춘 아비투스(Habitus) 신진문사(新進�-�)의 탄생을 기대한다. 좋은 머리로 쓰는 시가 아닌, 시 보다 인간이 먼저 된 따스한 가슴으로 시를 쓰는 왕관을 쓴 시인으로 가는 길을 생각해보자.